第 10 講 非我 暝想
여러分安寧하세요. 幸福公式을 떠올리면서 知 足暝想에 이어서 非我暝想을 工夫해 보십시다. 非我暝想. 종전에는 확률的으로 無我라는 말을 더 많이 썼을 거예요. 그런데 非我라는 말도 쓰였어요. 나는 非我라는 말이 더 좋아요. 無我. 그것은 나는 없다, 이런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非我는 내가 아니다 그러잖아요. 여기에서는 나의 있고 없음이重要하겠어요? 아니면 이고 아니고가重要하겠어요? 이고 아니고의 問題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어감이 非 我가 더 좋습니다. 그러나 非我 나 無我나 그 뜻은 끝내는 非我개념으로서 쓴 것입니다.
非我暝想이라. 자, 非我를 얘기하려면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非我를 말하기 爲해서 부처님 일대기 중의 한 部分을 끌어올려 보겠습니다. 釋迦牟尼는 29세에 산으로 들어갔어요. 산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그냥 누더기 옷을 입고 한 사람의 沙門이 됐습니다. 왜 그랬느냐. 속에 너무도 强烈한 問題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問題의식이었느냐. 사람이 한 번 태어나게 되면 한 번 죽잖아요. 釋迦牟尼는 죽음만 생각하면 不快했어요. 이 찬란한 人生이, 이 소중한 人生이 한 번 오는 죽음으로 해서 완전히 무의미로 돌아가 버린다. 이건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무나 愉快하지 않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은 완전히 상식的인 것입니다. 여러分들,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안 드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내가 그 생각으로 아주 절절하다고 하면 “아이고, 무슨 그런 생각을 해쌌냐” 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은 前生에 道人이었나.” 막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事實은 내가 그 죽음 問題 를 놓고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강도를 한 수 달리 해서 마음을 썼던 터라 釋迦牟尼께서 죽음에 걸려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 참으로 共感 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苦惱하고 딱 일치가 되는지 어쩐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거의 아마 이程度 는 되지 않을까 합니다. 一旦 죽는 것은 愉快하지 않다는 겁니다. 愉快하지 않아. 나는 죽음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은 거야. 말하자면 秦始皇心理입니다. 秦始皇心理란 내가 만들어낸 槪念 하나인데 釋迦牟尼의 그런 마음을 秦 始皇心理라고 보면 됩니다. 秦始皇은 어땠어요? 죽음이 싫었어. 그러니까 自己臣下들을 풀어서 不老 草를 찾게 했습니다. 不老草, 地球 곳곳, 地 球 끝까지 가서라도 不老草를 가지고 오너라. 不死의 藥을 가지고 오너라, 딱 이랬다고요. 그런 秦始皇心理가 사람이면 누구나 있습니다. 그래서 釋迦牟尼는 그 秦始皇心理로 苦惱를 했어요. 이 問題 를 어떻게 解決할 것이냐. 亦是 내가 王이 되고 무엇이 되고 그래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니까 산속으로 가서 한가하게 暝想하는 生活을 通해서 解決해야겠다고 해서 出家하신 겁니다. 勿論 여기까지는 아주 複合的인, 心理的인 展開過程 이 있기 때문에 다 얘기할 수는 없고, 그냥 블록을 잡아서 얘기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산속으로 갔어. 한 一週日간 暝想을 해본다고 혼자 이렇게 暝想을 해봤어. 마음대로 안 돼.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 만만한 일이 亦是 아니다. 그러니 누구인가 스승을 찾고 문화를 찾고 이래야 되겠다. 그래서 스승과 문화를 찾아서 修定主義 거두인 아라라칼라마를 스승 삼게 됐고, 아라라칼라마 밑에서 일, 이 주일 만에 스승의 境地인 無所有處定에 올라가 버렸어요. 스승이 놀라서 “나는 평생해서 이 境地에 왔는데 너는 이렇게 빨리 와버렸느냐. 너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다. 네가 내 수제자다. 이제 앞으로 너와 내가 내 교단을 운영하자.” 그랬습니다. 釋迦牟尼 立場에서는 어때요? 땡큐하겠습니까? 自己는 只今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問題인 것이지 暝想이 無所有處定이 아니라 무 無所有處定 까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내 죽음하고는 무관한 것이니 이것은 나에게 길이 아니요 하면서 스승을 떠납니다. 그 다음에 찾아간 스승이 웃다카라마푸타입니다. 웃다카라마푸타의 境地는 非相非非相處定이었어요. 거기에도 한 일,이 주일 하면서 쑥 올라가버렸습니다. 웃다카라마푸타 스승이 놀라서 “아이고. 世 上에.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나는 평생 努力 해서 비상비비상처정에 올랐는데 너는 어떻게 된 속이냐. 자네 놀랍네. 이제 나와 함께 교단을 운영하세. 자네가 내 수제자네." 그러면 釋迦牟尼가 ”아이고, 感謝 합니다. 무슨 은혭니까.“ 했겠습니까? 釋迦牟尼는 ”나에겐 問 題 가 있습니다. 그 問題解決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러하겠습니까. 마음은 感謝하나, 제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 하면서 또 떠납니다. 그 당시 靈性계의 最高 스승 두 사람을 거치면서도 問題解決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전에 자세한 것은 없지만 그 전에 이미 바가바 선인 等等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짧게나마 다 섭렵해버린 狀態였고, 마지막에 대스승이라고 하는 두 분을 다 통과하며 그 스승들의 境地에 모두 올랐으나 그 境地는 自身의 問題解決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거기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를 가야될까요? 안 해 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苦行을 안 해보았습니다. 苦行을 안 해보았으니까 이제 그러면 苦行 을 해보자 하고 苦行림에 들어가서 苦行한 時間이 5년 6개월程度입니다. 6개월 내에 두 스승을 거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겠습니까? 釋迦牟尼는 前生, 前生, 前生부터 暝想가였어요. 이미 前生前生 에 三昧의 한정없는 깊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三昧하게 되면 쑥쑥쑥 들어가 버렸지. 그런데 苦行 은 어때요? 5년 6개월 苦行을 했습니다. 苦行의 본질은 무엇이지요? 몸을 괴롭히는 것이 苦行입니다. 몸을 괴롭히려면 무엇부터 해야 될까? 먹는 것을 안 먹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안 먹으면 말라 죽어버리니까 최소한 먹자 해서 一麻一米, 삼씨 하나, 쌀 알 하나, 곡식 두 알을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그러니까 피골이 상접해 버렸어. 뉴델리 박물관에 가면 부처님의 6년 苦行상이 있는데 6년 苦行상은 딱 그 모습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피부가 뼈에 딱 붙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내가 3주일간 단식을 해보았는데 그와 비슷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6년 苦行상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고 共感 이 갑니다. 그런데 釋迦牟尼는 몸을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면서 最高로 인기였습니다. 정반왕의 태자 싯다르타 수행자가 苦行일인자라 해서 苦行으로 유명해졌습니다. 釋迦牟尼는 苦 行일인자 트로피를 손에 들었어요. 기뻤을까? 트로피는 남들이 준 것뿐이지 본인은 전혀 기쁘지 않아. 기쁘려면 自己問題가 解決 되어야 기쁘겠지요.
그런데 어느 瞬間에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몸에 기력이 너무너무 없어진 狀態에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돼요. 그래서 그 트로피를 팽개쳐버렸어요. 그 트로피, 금빛이 번쩍번쩍번쩍 했을 것 같지요? 트로피를 던져버리고 泥蓮禪河에 가서 목욕을 하려다가 쓰러져 버렸어요. 마침 양치기 소녀가 지나가다가 보니까 거지 수행자 하나가 쓰러져 있어요. 가서 보니까 숨은 쉬고 있어. 그래서 차고 있던 유미죽 통에서 유미죽을 꺼내가지고 입에다 집어 넣어줬어. 그러니까 달싹달싹 먹거든. 유미죽을 먹여서 一旦 살려낸 것입니다. 이미 피폐될대로 피폐되었던 釋迦 牟尼는 유미죽으로 기력을 찾게 됩니다. 기력 찾는데 유미죽을 한 2주나 3주 程度는 얻어먹었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 상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식 끝내고 먹기 始作할 때 한 一週日 먹으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5년 6년을 苦行하던 몸뚱이라서 一週日 얻어먹고는 아직 기력이 좀 어려웠을 테고 아마도 2~3주는 얻어먹었을 것이다 합니다. 2~3주程度 유미죽을 얻어먹으면서 기력을 찾아서 “아, 뭣인가 힘이 나고 이쯤 되어야 뭣이 되지.” 하고 보리수 하에 앉게 됩니다.
보리수 하에 딱 앉을 때 釋迦牟尼는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問題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내 스스로를 스승 삼을 수밖에 없다. 내 스스로를 스승 삼고 只今 보리수 하에 이렇게 결가부좌로 좌정한다. 여기에서 내 問題를 解決하지 못하면 이대로 죽겠다.” 합니다. 不成正覺不起此座. 不成正覺, 정각을, 큰 깨달음을,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면 不起此座,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천지신명에게 서약을 하고는 결가부좌하고 앉습니다. 앉았어요. 한 時間, 두 時間, 세 時間, 네 時間, 하루, 이틀. 아마 그것이 일 주일은 안 넘었을 것 같아요. 왜냐. 사람 몸이니까. 解決하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앉아서 죽겠다고 서약을 하신 분이기 때문에 일 주일程度 됐다고 해봅시다. 여러 分 들, 일 주일 동안 요지부동 이러고 있으라면 있겠어요? 어렵지요. 보통 사람은 어려워요. 그러나 大禪定 家들은 어렵지 않습니다. 딱 앉았어요. 일 주일이라고 합시다. 일 주일이 지나는 동안, 좌정에 들어가서 일 주일 후에 大覺이 성취됐다고 하면 일 주일 사이에 무엇을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겠어요? 그냥 簡單하게 곧장 답을 드리자면 思惟를 했어요. 思惟 . 思 索을 했어. 哲學적 思索을 했다고. 哲學적 思索을 했다고 하면은 깜짝 놀랄 佛敎 전문가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思索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른 어떤 것은 길이 없어. 오직 천하의 理致 를 工夫했던 것입니다. 格物致知, 격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의 모든 일이, 인류 문화사의 모든 것이 一旦 생각에서 나옵니다. 거기서도 그분이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생각 말고 다른 것을 通해서 나왔다고 자꾸 그런 발상을 내놓라고 하느냐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三昧를 더 깊게 해서 非相非非相處 定보다 깊은 禪定 에 들어갔기 때문에 됐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어요.
나는 죽는다.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죽는다. 나는 죽기 싫다. 여기에서 나는 죽는다와 나는 죽기 싫다의 교집합이 무엇이지요? 《나》입니다. 나는 죽는다. 나는 죽기 싫다. 이 두 문장의 공통분모. 그것은 《나》입니다. 나는 죽는다. 그런데 나는 죽기 싫단 말이야. 나는 죽는다. 나는 죽기 싫단 말이야. 釋迦牟尼가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解決하지? 나는 죽는데 나는 죽기 싫어. 이걸 어떻게 解決을 해야지? 하는데 드디어 그 《나》가 問題로 떠오른 거예요. 아, 내가 只今 죽기 싫어하는데 죽기 싫은 이 《나》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지? 그러면서 당연하게 이 몸뚱이가 《나》라고만 여겼던 그 《나》를 향하여 이 “나란 무엇이냐” 하는 問題 가 하나의 話頭로, 哲學的인 테마로 확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나의 存在에 對해서 가만히 暝想을 해보니까 나라고 하는 存在는 緣起적 存在였습니다. 이것이 實體로서, 唯我獨存式으로 그냥 나 혼자 잘나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空氣 없이는 살 수 없고, 물 없이는 살 수 없고, 아버지 없으면 存在하지 못하고, 어머니 없으면 存在하지 못하고, 할아버지 없으면 存在하지 못하고, 땅 없으면 存在하지 못하고, 하늘 없으면 存在하지 못하고 하면서 나를 存在시키는 存在 조건이 그냥 한정없이 막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全體가 어우러졌을 때 내가 무엇인가 의미를 갖는 것이지 《나》를 딱 끊어서 이것만이 《나》라고는 도저히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보이면서 여기서 《나》를, 이렇게 보면서 괴로워하던 이 《나》를 멀리 떼어 놓고 보아버린 거예요. 아, 저 存在는 空氣 없이는 存 在할 수 없고, 물 없이는 存在할 수 없고, 어미 아비 없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는 存在할 수 없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없이는 存在할 수 없고, 하는 存在가 딱 보입니다. 그래놓고 보니 《나》뿐만 아니라 世上에 存在하는 모든 것이 저 혼자 存在할 수 없었습니다. 恒常 다른 무엇과 關係를 맺으면서 存在하는구나. 關係, 關係 , 關係 , 關係, 關係. 이것은 완전히 네트워크 的인 存在예요. 속으로 들어가 보아도 네트워크요. 밖으로 나가 보아도 네트워크요. 네트워크的인 存在로 딱 엮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렇게 重視하던 《나》를 멀리 떼어 놓고 보니 그 《나》는 全體 대 自然중의 部分집합의 하나로, 한 고리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에 對해서 이기的으로 마구마구 집착하던 에너지가 쏙 빠져버리면서 에너지가 宇宙的 으로 팍 열려버렸어요. 그러니까 나에 對해서 심각하게 걸려있는 마음이 탁 놓여져 버린 겁니다.
그런데 暝想가들은 거기에서 고비를 넘기지를 못 해요. 緣起的인 理致는 이야기하는데 그 緣起의 狀況을 바라보면서 내 속에서 확 뿜어져 나오는 대자유감까지 이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냥, 理致로만 생각만 하지 자유감, 解脫감을 느끼지 못하니 유감스럽지요. 緣起 이므로 空한 것이고, 공하기 때문에 解脫인 것입니다. 그럼 解脫 이 무엇입니까? 結局은 解脫이 무엇으로 드러나야 되겠어요? 끝내는 자유감으로 드러나야 됩니다. 마지막 결실은 感 입니다. 자유감. 解脫감. 그래서 느낌이 구원이다, 느낌이 解 脫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分들 속에서는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저 말이 옳을까, 그를까 그렇게 생각이 되십니까. 어때요? 이 때 龍陀스님 말씀이 옳을까, 그를까, 그러지 말고 여러分들이 自燈明的으로 스스로 생각해봐서 아, 내가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럴 것 같다 이래야 합니다. 龍陀 스님 말도 곧이 안 들린디면 또 누가 말해도 또 곧이 안 들려서 저 말이 진짤까 아닐까 또 따질 것 아닙니까. 또 따지고, 또 따지고, 또 따지고, 또 따지고 따지다가 세월 다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自燈明을 해야지 끝내는. 아, 저 말씀을 근거로 해서 내가 생각해보니 정말 저 말이 그렇겠다 하고 생각을 해야 그것이 내 것이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分들이 緣起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면 緣起이기 때문에 어느 部分을 확 잡아가지고 그것을 實體시해서 《나》다, 무엇이다 할 수 없겠구나가 보이면서 탁 트여버린, 연결된 全體가 보여야 됩니다. 全體가 보이면서 어느 하나로 區劃되어져 있던 이 답답한 이 마음이 탁 놓여져 버려야 됩니다. 놓이면서 그 놓여진 탁 트임을 自己 가슴에서 경험을 해야 합니다. 이 볼펜도 여기에 集中을 할 때에는 내 마음이 여기에 딱 요렇게 딱 갇힙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면 全體가 싹 보이면서 볼펜에 集 中하던 마음이 탁 놓여지게 됩니다. 건너다보면서 解脫감이 체험되는 것입니다. 自己自身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은 只今 우리의 主題인 非我, 無我란 무엇일까요. 無我의 논지는 緣起에 있습니다. 緣起이므로 非我 요, 無我입니다. 그래서 내가 空理스물일곱 가지를 整理한 것 중의 1번이입니다. 왜? 釋迦牟尼께서 格物한 結果, 緣起 를 致知 해내셨어요. 그것을 해공27조의 1번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 緣起故空 보면 이 世上에 存在 하는 모든 것들이 全部緣起입니다. 저 혼자 독립할 수 없어. 예를 들면 죽음이 있으려면 生이 있어야 됩니다. 생이 있으려면 생의 뿌리인 씨앗이 있어야 돼. 業이 있어야 돼. 有라고 하는 업이 있어야 돼. 이것이 또 만들어지려면 행위가 있어야 되고 행위가 만들어지려면 이러고 저러고 해야 됩니다. 이래서 十二緣起라고 하는 순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혼자 독립된 實體는 없어요. 全部關係를 맺으면서 空間的인 關係, 時間的인 關係 를 맺으면서, 空間的으로 수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어야 되고, 時間的으로 수많은 것이 연결되어서 이 고리 하나가 存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고리가 어리석을 것 같으면 제가 혼자 잘난 줄 알고 여기 《나》에 集中을 하게 되요. 그것이 自我고 그것이 實體입니다. 이 實體를 깨뜨려주자는 것이 佛敎입니다. 왜? 實體에 걸려들었다 하면 고통이 始作되고 전쟁이 始作됩니다. 그러니까 이 實體를 放下 하게 만들어야 되겠다 이 말입니다. 實體가 놓아지려면 實體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보니까 本來實體가 空 하더라, 緣起 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緣 起이므로 空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分들 몫입니다. 여러分들이 거기에 머물러서 잘 들여다보십시오. 아, 공하구나 하는 것이 올 때는 먼저 理致 로 옵니다. 그러나 理致에 머무르게 되면 학자입니다. 理致로 왔을 때 自己 느낌을 살펴보십시오. 理致로 공하구나 하고 왔을 때 느낌을 살펴보면 그 理致 의 있고 없음의 差異. 그 理致를 모를 때에 比하면 한결 달라진 탁 트인 氣分을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氣分을 느껴야 결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分들 몫입니다. 그래서 저 緣起故 空을 多樣한 메뉴로 만들어냈어요. 여기에 쌀이 있으면 쌀을 가지고 떡도 만들고 뭣도 만들고 밥도 만들고 뭣도 만들고 뭣도 만들고 하듯이 緣起를 가지고 四聖諦를 만들고, 緣起를 가지고 十二緣起를 만들고, 緣起 를 가지고 八正道를 만들고, 緣起를 가지고 막 다 만드는 겁니다. 分析故空도 緣 起입니다. 내 몸뚱이는 地水火風이 緣起的으로 조합된 것입니다. 내 몸뚱이를 分析的인 緣起관으로 해보면 地水火風입니다. 그러면 내 몸에 애착을 붙이고 내 몸, 내 몸, 내 몸 하던 마음을 살짝 내려놓고 내 몸을 地水火風으로 관조해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地水火風으로 딱 관조될 때 내 몸에 집착했던 마음이 地에 집착하겠어요 水에 집착하겠어요 火 에, 風에, 그 어떤 것에 집착하겠어요? 내 몸을 네 조각이 아니라 100조각으로 쫘악~ 흩어 놓아 보십시오. 100쪽을 어디 가서 내 마음이라고 하겠습니까. 那禪比丘經의 馬車비유. 바로 그것이 無我觀의 하나입니다. 分析故空법입니다. 저기에 馬 車가 있지 않느냐. 예, 어디 馬車가 있는가 봅시다. 그래서 馬車 를 딱 분해해서 “대왕이시여, 馬車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습니다. 그 때 대왕은 그 말에 무릎 딱 꿇고 “당신은 나의 스승입니다” 하고 나선비구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내가 馬車, 馬車, 馬車, 馬車했는데 馬車를 딱 분해해 놓고 보니까, 아니 分明히 馬車는 사라지지 않고 마당에 쫙 깔려있기는 한데 馬車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든. 그러니까 馬車, 馬車, 馬車, 馬車 하면서 馬車에 집착하던 마음이 딱 놓여지는 것입니다. 이 心理過程에서 일어나는 탁 트인 氣分 체험은 여러 分들이 해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해내시게 하려고 해공27조까지 만들어서 여러分들 손에 쥐어주지 않았습니까. 해공27조를 거듭 이렇게 들여다보고, 또 음미해보고, 음미해보고, 음미하다 보면 여기에서 탁 트이는 그 느낌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分析故空으로 보더라도 非我이고 그냥 緣起的으로 봐도 非我입니다. 緣起의 다른 버전인 分析故空으로 보더라도 몸뚱이는 地水火風이니, 地 가 나라고 할 수 있겠냐. 水가 나냐, 火가 나냐, 風이 나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 않느냐 해서 無我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精神, 내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잘 보니까 受想行識 이 엮어진 것입니다. 受想行識이 엮어진 이것을 只今까지 내가 마음이라고 했는데 受는 수일뿐, 그것이 나냐, 내 마음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受는 수입니다. 想은 상일 뿐, 나는 없습니다. 受想行識,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속으로 보면 受想行識이기 때문에 속으로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밖의 몸뚱이는 地水火風 이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그래서 내가 只今까지 나, 나 했던 것은 내가 한 생각 일으켜서 區劃을 억지로 만들어가지고 이것이 《나》야,重要한 것이 나야 나, 이랬을 뿐이지 깨닫고 보니, 理解하고 보니, 《나》라고 하는 것은 本來 이 世上에 없구나 하는 것이 확실해져야 합니다. 이 無我가 확실해져 버릴 때 自我가 사라져버립니다. 自我뿐만이 아니라 對象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컵도 컵에 集中하면 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分 들, 이 컵이 存在하는 것 같지요? 이 컵을 存在시키기 위해선 온도부터 必 要합니다. 온도가 只今의 이程度여야 합니다. 온도가 갑자기 가 5,000 도가 되었다고 해보십시오. 컵이 어디 있겠어요? 녹아서 다 증발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온도까지 合해서 컵을 논해야 됩니다. 그런데 왜 다른 것은 배제해놓고 딱 요것만 가지고 컵, 컵 하고 있습니까. 또 컵, 컵 하면서 幸福하면 좋은데 幸福하지 않아요. 컵 가지고 싸웁니다. 그래서 해공27조가 여러分들 非我感의 답입니다. 해공27조, 空에 접근하는 스물일곱 개의 방법을 거듭 음미하면서 이렇게 느껴보고, 느껴보고 하다가 보면 묘합니다. 暝想이란 것이 묘합니다. 처음에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것이 暝想입니다. 그런데 暝想에 익어지다 보면 술술술술 마시는 것같이 술술술술 됩니다. 적응이 됩니다. 저 非我暝想도 마찬가지, 頓忘도 마찬가지, 知足暝想도 마찬가지, 죽음 暝想, 나지사 暝想全部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점점 적응이 되면서 아, 너무너무 당연하네 하면서 그 境地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딱 내 몸이 됩니다. 여러分들이 백산이 되기 爲해서 다소 努力해야 될 거예요. 여러 分들이 백산程 度가 되려면 이것을 보고 컵이라고 우겨대는 마음부터 없어져야 합니다. 非我暝想의 완료는 欲 求 제로화의 完成입니다. 그래서 非我暝想 이 확연해지게 되면 頓忘필요 없어요. 非我가 확실해져버리면 바로 頓忘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非我가 하나의 구원론이예요. 그래서 佛 敎를 空門이라고 합니다. 空門. 佛敎全體를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空門, 공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자, 非我관에 對해서 時間이 계속 許諾이 된다면 이야기거리는 계속 있습니다. 이쯤 非我工夫, 無我工夫를 하고 이 時間마칩시다.
感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