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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0年부터 只今까지 40年 間 同事攝 이라는 集團敎育 프로그램을 가지고 敎育해왔습니다. 프로그램 內 容은 正體, 大 願, 修心, 和合, 作 善이라는 삶의 5대원리를 理論 的으로 깨닫는 것과 그 理論을 實習으로 體驗하는 것입니다. 超 宗敎的인 프로그램이어서 佛 敎徒만이 아니라 基督 敎, 天主敎, 圓佛敎 等 의 敎徒들은 勿論 많은 聖職者가 參 與했고, 初等生 으로부터 80 이 넘은 老翁까지 3 萬餘 名이 5 泊 6 日 課 程을 盛滿해 왔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相談 從事者 들도 同事攝에 參與하시어 다양한 팁들을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고맙게도, 相談家들의 모임에 招 待되어 相談에 關 해 이야기하게 되어 기쁩니다.
바라건대, 相談家들이 많은 이의 苦 痛과 어려움을 解決해 주어서 天下의 良場力이 高揚 되었으면 합니다.
相談이란 相談家 가 來談者의 問題를 解決해 줌으로써 來談者의 幸福 增進을 돕는 過程 일 것입니다. 이러한 重大 過程을 擔當하고 있는 相談家가 갖추어야 할 人品 條件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相談家라고 하면 世 上 사람들이 不幸의 那 落에서 벗어나 幸福의 언덕으로 건너가도록 돕는 者라고 생각할 때 相談家라면 무엇보다 于先 스스로 幸福1)해야 할 터입니다. 그래서 相談家의 人品 條件 을 묻는다면 그 0 番이 幸福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여, 이番 에 여러분께 말씀드릴 主題를 幸福(解脫)으로 잡고 幸福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理論을 더해볼까 합니다.
1. 只今여기 바로 幸福을 누리고 있는가? 《卽幸》
나는 眞正 世上에 있는 모든 存在가 幸福하기를 빕니다. 幸福이란 좋은 느낌입니다. 기쁨이요, 氣分 좋음입니다. [가슴 마음]이 좋은 것을 幸福 이라고 하지요. 느낌은 스스로 存在할 수 없습니다. 恒常 어떤 條件에 依해 드러납니다. 幸 福이라는 느낌은 願하는 것이 成就되고 所 有될 때 일어나는 느낌이지요. 正確한 表現으로는 願하는 것이 成就되고 所 有되었다고 생각할 때 隨伴되는 느낌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認識, 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未來 에 이루어질 所有, 成就 度 있지만, 이미 所有되고 成就된 것들이 넘치고 있다는 事實입니다. 同事攝에서는 이미 있는 것을 旣 存이라 하고, 이미 이룬 것을 旣成, 未來에 다가올 成就는 未成이라고 합니다. 幸福을 論하는 자리라면 대단히 重 要한 槪念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넘치는 旣存, 旣成 의 所有 (成就 ) 속에 있으니 이미 넘치는 幸福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認識이 確然 해지는 程度만큼 幸福 은 完成되는 것입니다. 없다는 생각은 憂鬱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은 豐饒感, 곧 幸 福을 부르는 것이지요.
不幸이니, 幸福이니, 解脫이니를 論하는 자리라면 最 優先으로 [幸不 幸三段階 法則]을 理解 하는 것이 좋습니다. 不幸, 幸福, 解脫이란 스스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恒常 무엇과의 關 係狀況에서 빚어지는 느낌 現象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關係 狀況을 살펴보면 세 段階 로 整理됩니다.
幸不幸 三段階法 則
自信의 意 識이 對象과의 關 係狀況에서
- 《1》否定的으로 생각하면 否 定的인 느낌(不幸 )이 經驗되고,
- 《2》肯定的으로 생각하면 肯 定的인 느낌(幸福 )이 經驗되며,
- 《3》超越的으로 생각하면 걸림없는 느낌(解脫)이 經驗된다.
이 《1》, 《2》, 《3》을 [幸不幸三 段階法則]이라 합니다. 不幸해지고 싶다면 否定 的으로 생각하면 되고, 幸福해지고 싶다면 肯 定的으로 생각하면 되며, 解 脫을 願한다면 肯否 定의 생각을 止揚하면 됩니다. 佛敎를 中道敎 라고도 하는 데 中道란 바로 肯 否定의 止揚을 意味합니다.
只今 主題는 幸 福입니다. 三段階法則中 第 2 段階입니다. 이 메시지를 接하고 있는 여러분은 只今 여기, 바로 幸福을 누리고 계십니까? 先生님이나 聖職 者나 相談家 라면, 또 어느 程度 修行 을 하신 分이라면 이 물음에 自信感 넘치게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只 今 여기, 바로 穩全한 幸 福으로 臨在할 수 있는 祕 訣이 무엇일까요?
다음 세 가지를 確實히 하면 됩니다.
- 《1》이미 넘치는 幸福 속에 있음을 깨닫기(이해하기, 認 識하기).
- 《2》위(位) 《1》을 깨닫는다고 해도 意識圈 또는 潛在意識圈, 無意識 圈에서 無數히 깨달음에 相應하지 못하는 否定的 생각과 否定的 情緖를 許容하고 있음을 自覺하기.
- 《3》위 《2》가 現實이라면 어찌해야 할까요? 《1》로 돌아가기입니다. 깨달음 《1》을 反 復觀行하는 것입니다. 곧 具體的으로 豐饒 目錄, 곧, 旣存 과 旣成을 確認하는 目錄을 만들어 이미 넘치는 所有, 넘치는 幸福 속에 있음을 瞑想 觀行하는 것입니다. 豐饒 目錄은 一旦 旣存의 것들, 旣成의 것들입니다. 몇 番 程 度 慣行해야 할까요? 多多益善입니다.
幸福을 위해 다음과 같은 寸鐵 的 말씀들을 思惟하고 吟 味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幸福이란 願하는 것이 所 有(成就)될 때 經 驗되는 좋은 느낌(기쁨, 氣分 좋음, good feeling)이요, 解脫이란 執着 하던 것을 놓을 때 經驗되는 개운한 느낌이다. 幸 福이나 解脫이나 good feeling이라는 點에서는 같다.
- 幸福은 準備하는 幸福이 아니라, 바로 只今 누리는 幸福이라야 한다. 勿論 準備하는 幸福이 안 重要하다는 것은 아니다.
- 世上 사람은 一旦 둘로 나뉜다. 只今 여기, 自身 의 窮乏에 注目 하고 있는 사람과 自身의 豐饒에 注目하고 있는 사람이다. 좀 더 正 確하게 表現한다면 0.01%圈 사람을 除 外한 거의 모든 사람이 一旦 程度의 差異가 있을 뿐 窮乏注目型 에서 穩全히 自由 로울 수 없지 않나 생각한다. “只今 여기, 穩全하게 幸福 하냐?”고 다그쳐 묻는다면 窮乏에 注目 하고, 窮乏感을 느끼고 있는 程度만큼 한결같이 ‘나는 XX 等으로 幸福하지 못한데~~~’ 할 것이다. 窮乏注目形 의 사람들은 패턴的으로 이러한 窮乏型 이나 憂鬱型에 묶여 있다. 이때 사람이라면 當然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便들어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窮乏 狀況 이라는 事實이 있다면 그것에 相應하는 行動이 있을 뿐 窮乏感에 시달릴 일은 아니다. 金 剛經을 아는 이라면 應無所住而生 其心이라는 삶의 指針 에 머물 것이다. 窮乏型 사람이라면 다음 한두 寸鐵이 빛을 發할 것이다. [만큼 哲學]이나 [半컵 사이다의 原理 ]이다. 어떤 窮乏 狀 況, 不幸 狀況이라도 視線을 이미 있는 豐饒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만큼 오케이인 狀況이요, 《半컵》이나 있는 오케이 狀況인 것이다. 만큼 哲學 의 態度는 絶對 幸福이라는 頂上 을 向해 가는 道程에서 緩衝地帶가 될 것이다.
- 누리며 나아간다. 찡그린 얼굴로 걸어가는 것과 微笑 지으며 걸어가는 것의 差異에서 삶의 重大한 原理 하나를 얻어야 한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씹으면서 일터에 나가는 사람과 이미 지니고 있는 豐饒(所有,成 就)를 確認하고 누리면서 일터에 나가는 사람이 原理的 次 元에서 差異가 있음을 確然히 認識하는 것 自體가 삶의 한 智慧이다.
- 豐饒 目錄을 만들어 吟味하고 나눈다. 豐饒는 생각해 볼수록 自身을 기쁘게(幸福하게) 하는 旣存 , 旣成의 것들이다. 同事攝에서는 魂 3千條, 몸 3千條, 經驗 3千條를 基本 豐饒目錄 로 整理한다. 自身에게 이미 있고, 이미 이룬 것을 目錄으로 整理해서 느끼어보고 周邊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 이 瞬間 생각하는 것이 이 瞬間 의 《나》이다. ‘나는 못났다.’라고 이 瞬間 생각하면 나는 못난이이다. 豐饒 를 생각하면 나는 豐饒다. 豐饒 생각의 回數가 많아지면 어떤 現 象이 일어나겠는가? 回數에 比例해서 豐饒人 品이 된다.
- 原理가 大家를 낳는다고 했다. 相談의 大家 가 되려면 相談의 原理 들을 잡아야 한다. 幸福의 大家가 되려면 幸福의 原理를 잡아야 한다.
- 只今, 여기, 바로 幸福 을 누리려면 [이미 넘치는 所有, 넘치는 幸 福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 깨달음은 知足 , 感謝, 肯定 , 豐饒에 눈뜸이다. 知足瞑想, 感謝 瞑想, 肯定瞑想, 豐饒瞑想은 같은 뜻의 다른 表現들이다.
- 名 相談家가 되려면 只今 여기, 스스로 幸福 으로 넘쳐야 한다. 只今 여기, 바로 自身을 돌아보라. 幸福 이 넘치고 있는가? 幸福이 넘치고 있지 않다면 幸 福에 넘치지 않도록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요, 幸福하다면 幸福 하도록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가만히 살펴보라! 餘地없이 그러함을 認識 할 것이다. 좋아하는 半 컵의 사이다를 놓고 ‘半 컵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면 氣 分이 좋지 않고, ‘半 컵이나 있다.’라고 생각하면 氣分이 좋다.
- 一切唯心造 라는 華嚴經의 말씀이 있다. 모든 經驗은 생각이 決定한다는 뜻이다. 只今 여기에서 바로 幸福 을 經驗하려면 幸福 하도록 생각하면 된다.
- 사람은 大部分이 -+#의 原 理(마이너스 플러스 쌍(雙)플러스의 原理: 幸 不幸三段 階原理)로 世上을 經驗하는 법(法)이다. 億萬 가지 아이템이 나부끼는 世上은 우리에게 세 가지 類型으로 經驗된다. -, +, #이다. 곧 마이너스(不正)로, 플러스(肯定)로, 쌍(雙 )플러스(超越)로 經驗 된다는 것이다. [否定的으로 생각하기, 肯定的으로 생각하기, 超越的으로 생각하기]에 相 應하는 經驗이다. 否 定的으로 생각하면 氣分 나쁨(불유쾌, 不幸)을 經驗하고, 肯定的으로 생각하면 氣 分 좋음(유쾌, 幸福)을 經驗하며, 超越 的으로 생각하면 快不快 價 아닌 超然한 느낌을 經驗한다. 不幸을 원(願)한다면 否定的으로 생각하면 되고, 幸福을 원(願)한다면 肯定的으로 생각하면 되며, 解脫 을 經驗하려면 兩邊 (兩邊: 眞僞, 善惡, 美醜)을 놓으면 된다. 그런데 眞僞, 善惡, 美醜는 사람의 意識 밖에 實體로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主觀的으로 附與 하는 것이다.
- 不幸한 자(者)는 없음에 注 目하고, 幸福한 자(字 )는 있음에 注目한다. 《世上에 떠도는 寸鐵》
- 只今 마음이 맑고 밝다면 現在 의 幸福이요, 過去 의 마음이 淨化되며, 未來의 人生에 맑고 밝은 일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只 今 여기에서 바로 肯定的 생각을 하여 肯定的 느낌을 經 驗하라.
- 누구나 이미 있고《旣存》, 이미 이룬 것《旣成 》으로 넘치는 成就, 넘치는 所 有 속에 있다. 旣存旣 成에 注目하지 않고 未 成(아직 이루지 못한 것, 未來에 이루어질 것)에 執着하는 것은, 人生에 對한 無知요, 幸福에 對한 抛棄다. 只 今 바로 窮乏에 注 目하는 意識의 習 慣에서 벗어나 豐饒에 注目하고, 豐饒를 누리는 삶으로 轉換하라. 窮乏에의 注目은 現在의 不幸이요, 過去에 堆積해온 挫折의 限에 기름을 붓는 일이며, 未來의 窮乏 을 부르는 것이다. 아무튼 旣存旣成 (이미 있고, 이미 이룬 것)에 눈뜨는 것이 豐饒에 눈뜨고, 豐 饒에 注目集中하고, 豐饒를 누리는 것이다.
- 幸福公式:
幸福은 所有에
比例하고 欲求에
反比例한다. 幸
福量을 增進
하려면 所有量을 最
大化하면 되고, 欲求
量을 最少化
하면 된다. 所有 最大
畫家 만만한 일이 아닐 터, 欲求量의 最少化가 賢明한
일이다. 欲求의 最少
化는 解脫에 相
應한다.
幸福公式:
幸福 = ━━━━━所有欲求 - 欲求에는 必要의 欲求로부터 執着의 欲求까지 無水 段階가 있다. 欲求 水位를 1~100段階로 나누어본다면 30段階까지는 모두의 幸福 을 위해서 꼭 必要한 善한 欲求다. 30段階 以上으로 올라가는 欲求는 漸漸 利 己的이고 執着的인 欲求로서 惡한 欲求이다. 80段階 以上의 欲求 는 不必要한 執 着的 欲求 이요, 自身을 망치고 이웃을 짓밟는 欲求 이다.
2. 只今여기 바로 解脫 을 누리고 있는가? 《卽脫》
解脫을 누리려면 解脫의 槪念을 理解하고 그것을 삶으로 體驗해야 할 것입니다. 解脫이 무엇이냐를 論함에는 原 始佛敎의 觀 點, 大乘佛 敎의 觀點, 나아가 各 宗派들의 觀點 에 依해 달리 定義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은 當然합니다. 龍陀의 觀點은 禪佛敎 에 바탕을 둔 觀點으로서, [걸림 없는 自 由感]을 解脫 이라 하고, 解脫이란 解脫 感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解脫을 누리고 있느냐는 質問을 받는다면, 걸림 없는 自由感, 걸림 없는 解 脫感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가를 살펴 答하시면 됩니다. 人生에서 걸림없는 自由가 얼마나 重要한 것인지 認識하고 계십니까? 나아가 鎭靜 걸림 없는 自由 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 質問에 對해서 걸림 없는 自 由에 別 關心 이 없다는 答이 나온다면 그런 사람은 佛敎式 으로 無緣衆生(因緣이 없는 사람)입니다. 只今 여기 幸福解脫보다는 어떤 欲求不滿으로 알게 모르게 憂鬱의 늪에 빠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勿論 理解 가 되는 일입니다. 願하는 것을 成就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루어 가되 只今 幸福解脫하면서 해가면 좋다는 것이지요. 願 하는 것을 잘 이루기 위해서라도 只今餘機, 바로 幸福해야한다는 自覺이 삶의 態度로 서 있는가 보세요. 자, 거듭 묻습니다. 문득문득 自身을 돌아볼 때 걸림 없는 탁 트인 自 由로운 느낌으로 살고 계십니까?
[不幸이니, 幸福이니, 解脫이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자리라면 幸不幸三段階 法則에 깊게 머물러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人 生이란 對象(色 聲香味觸 法)과 마주치는 過程입니다. 그 對象을 [否定的 으로 생각할 수 있고, 肯定的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肯否定을 넘어선 超越的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깊게 注目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三段 階가 幸不幸을 論議 하는 據點이기 때문입니다. 幸 福을 論議하려면 有爲法의 幸福 과 無爲法(頓法)의 幸福을 區 別하는 것이 좋습니다. 一般的으로 幸福이라 할 때는 有爲法의 幸福을 말하고, 解 脫이라 할 때는 無爲法 (頓法)의 幸福을 말합니다. 解脫을 누리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無爲法의 幸福 을 經驗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禪佛敎에서는 無爲 法보다는 頓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無爲라는 말은 道敎에서 맨 먼저 썼을 것이고, 頓法이라는 말은 禪 佛敎에서 最初 로 썼을 것입니다. 어찌 됐든 無爲法과 頓 法은 表現만 다를 뿐 뜻은 같습니다. 禪佛 敎를 代表하는 巨 匠이신 六祖惠 能 大師께서는 禪 佛敎의 걸림 없는 境地 를 깨달으시고 나서 [唯傳頓法]이라는 旗幟를 내 걸으셨지요. 오직 頓 法만을 傳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인지, 나는 頓法이라는 말을 훨씬 좋아합니다.
槪念 整理가 길어졌군요, 斟酌하셨겠지만 穩全한 幸福을 누리려면 [이미 넘치는 所有, 넘치는 幸福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듯이, 穩全한 解脫 을 누리려면 이미 解脫 속에 있다는 理致 , 곧, [頓法(無爲法 )]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共同體 에서는 準備된 者라면 5分 程度의 時間 에 頓法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只 今 바로 이미 解脫 속에 있다는 理致(事實)를 깨달아버립시다. 頓法이란 幸不幸三段階法則 中 第 3段階 깨달음의 端緖가 되는 [超越 的인 생각體系]를 말합니다. 이 瞬間 여러분이 準備된 者라면 5分 안에 解脫을 經驗할 수 있을 것입니다.
煩惱構造論 에서 理解하시겠지만, 世上 사람들 全般이 意識 이 들자마자 무언가를 槪念化합니다. 나, 너, 그이, 그女, 그것, 눈, 귀, 팔, 다리, 볼펜, 冊, 沙 果, 배, 善, 惡, 美 , 醜 等等. 天下는 緣 起의 世上인데, 열린 緣 起世上을 등지고 닫힌 實 體의 世上으로 墜落합니다. 槪念은 執着의 始作이자 執 着 自體입니다. 《나》라 規定 하면서 《나》에 執着하고, 《너》라 規定 하면서 《너》에 執着하는 心理現 象을 當然하게 여기면서 《나》의 業, 《너》의 業을 키워갑니다. 善이라 規定하면서, 그 善이라 하는 것에 執着하고, 惡 이라 規定하면서, 그 惡이라 하는 것에 執着합니다. 美라 規 定하면서, 醜라 規定하면서, 眞이라 規定하면서, 僞라 規 定하면서, 大라, 小라, 東이라, 西라, 天使라, 惡魔라, 하늘이라, 바다라, 金이라, 똥이라 規 定하면서 그것들에 執着합니다. 이 規定, 이 執着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너무도 當然하게 여기며 걸려듭니다. 及 其也는 地獄과 戰爭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槪念 化는 生活의 便 宜上 絶對로 必要합니다. 그러므로 槪念 化는 하되 執着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不思善不思惡 正與麽 時 那個是 明上佐 本來面目《善도 惡도 생각하지 말아보십시오. 그때 스님의 참모습은 무엇입니까?》 惠能 禪 師께서 깨달으신 後 師兄 인 惠明 스님께 던지신 問道입니다. 스승의 衣鉢 이 더벅머리 盧行者에게 傳 授 된 것을 알고 慧命스님은 그 衣鉢을 빼앗고자 몇十 里를 뒤쫓아 노행자를 덮쳤습니다. 그런 狀況에서 노행자(혜능선사)의 法의 카리스마에 壓倒된 혜명 스님은 “저에게 重要 한 것은 醫發이 아니라 法(眞理)이옵니다. 法을 說해주십시오!”라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때 盧行者는 혜명 스님에게 위의 話頭를 던집니다. 그 質問, 그 問道, 그 話頭가 던져지자 慧命은 5分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金剛經에 《A는 A가 아니고 便宜上의 이름이 A일 뿐이다》라는 文章이 20回 以 上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中 準備된 분은 只 今쯤 깨달음과 解脫의 微 笑를 짓고 계실 것입니다. 5分 思索(思索: 思惟, 생각)이면 解決될 일을 10年, 20年 參禪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文 化的으로까지 굳혀져 있는 뭇 靈性村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똥은 사람에게는 더러움의 對象이지만 개에게는 군침이 도는 밥입니다. 사람과 個는 제쳐두고 똥 自體는 무엇입니까? 神聖한 something 아닌가요? 元曉께서 唐나라 留學길에서 骸骨물을 마시고는 그 길로 그냥 歸鄕해버린 것은 바로 그 something을 點頭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只今 바로 兩邊을 놓아보십시오. 兩邊이 놓일 때 바로 걸림 없는 自由感이 느껴질 것입니다. 모든 存在를 是非 넘어선 something으로 觀照 하면서 解脫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未盡 하신 분은 龍陀關을 노크하십시오.
3. 人生의 目的은 무엇일까?
諒解를 求합니다. 暫 時라도 思索의 時 間을 갖도록 ( )의 內容을 脚註로 整理했습니다. 問道六章2)은 同事攝 修鍊 劈頭에 所 重히 다루는 主題입니다.
- ✴ 삶을 決定하는 것이 價値 觀(價値觀, 信念, 思考方式, 생각)이라면 目的價値觀 定立이 第一 重 要하다.
- ✴ [좋은 느낌], 곧 幸福이 人 生과 歷史와 모든 文 化 文明의 目 的이다.
- ✴ 느낌에 눈뜨지 못한다면 삶은 SHOULD, MUST에 묶이게 된다. 나는 同事 攝이라는 修鍊프로그램으로부터 많은 恩 惠를 입었다. 입은 恩惠中 最 高의 恩惠는 느낌에 눈뜬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 느낌을 모르고 살던 半平生은 SHOULD와 MUST에 묶인 索 莫한 삶이었다.
- ✴ 人生의 窮極의 目的은 우리 모두의 幸福 이다. 곧 無限 宇宙 에 있는 有形無形 , 有情無情 모든 存在의 幸福 解脫과 맑고 밝은 相生 氣運이다. 金剛 經 正宗分 에서 이르는 所有一切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 生 若化生 若有 色 若無色 若有 想 若無想 若非 有想非無想 我皆令 入無餘涅 槃 而滅度 之《宇宙에 存 在하는 모든 衆生들, 곧 알로 태어난 것, 胎로 태어난 것, 濕으로 태어난 것, 化로 태어난 것, 色깔이 있는 것, 色깔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九 類衆生)을 두루 다 濟 度하여 니르바나에 들게 하리라 하고 서원하라.》라는 至嚴 한 말씀을 想起해보는 것도 좋다.
4. 마음이란 어떻게 생겼을까?
相談家라면 마음에 對한 理解 體系가 어떤 式으로든 定立된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平生 마음을 主題로 삼고 마음에 對해서 理解하고 다루고 나누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結果 [마음 3拍子]라는 最終的 인 마음學 整理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相談家나 마음工 夫人이라면 이 마음 3拍子 가 마음 旅行의 羅針 盤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마음 3拍子
《1》마음은 (A)9) 과 (B)10) 으로 構 成되어 있다.
《2》A 는 目的 機能 이요, B 는 手段 機能이다.
《3》故로, 느낌 좋도록 생각해야 한다.
마음은 [느낌과 생각], [생각과 느낌]이 全部라고 안다는 것이 마음工 夫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느낌은 가슴 마음이자 속마음이요, 생각은 머리 마음이자 겉마음입니다. 마음공부인(마음工夫人)이나 相 談家라면 위의 圖式 이 보여주는 마음에 대(對)한 理解를 基 本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幸福解脫이라는 느낌을 위해 생각 잘하기가 얼마나 重 要한가를 認識함으로써 시들하게 나동그라져 있던 知性軸은 革 命的으로 活力 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여러 寸鐵的인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 《생각》이 人生의 全部 는 아니더라도 삶의 구석구석을 생각이 支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낮은 水準의 생각은 地獄 과 싸움을 부르지만, 높은 水準의 생각은 幸福이라는 느낌을 經驗하게 하고, 最高 水準의 생각은 解脫 과 大慈大悲 라는 느낌을 일으킨다.
✴ 이미 넘치는 所有 (成就 )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넘치는 幸福을 經驗한다.
✴ 많은 靈性村에서는 생각하는 것을 마음工夫에 있어서 禁忌 事項으로 取扱한다. 莫存知解, 不 立文字를 家風化까지 한다. 질(質)이 얕은 생각을 止揚해야 하는 것은 當然히 옳지만, 생각 自體 를 禁하는 惡弊는 지극히(至 極히) 잘못된 것이다.
✴ 八萬大藏 經이 全部 생각 體 系요, 바이블이 모두 생각 體系요, 四 書三經이 생각 體 系이며, 天下의 산더미(山더미) 같은 人文學 , 自然科學 書籍이 모두 생각 體系이다. 프로이트로부터 로저스까지의 모든 相談 書籍들이 생각 體系요, 音樂, 美術, 體育 等의 理論 書籍들이 모두 생각體 系이다. 釋迦牟 尼의 緣起法 이 생각(思惟, 思索 )을 통해 얻어낸 생각 體系요, 四聖 諦, 12緣起, 8正道가 모두 생각이요, 無常 , 苦, 無我 等 의 解脫 方便 이 모두 생각 體系이다. 이 모든 생각 體 系들이 다 幸福하기 위한 手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 생각을 잘해야 한다는 것도 생각이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생각이다. 意識 의 窮極의 境地 에서는 느낌과 생각을 다 끊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이다. 이것은 하겠다, 저것은 하지 않겠다 式의 各種 行動誘 發의 當爲도 다 생각이다. 一言 以蔽之하여 모든 感 覺認知 過 程에는 그에 相應하는 느낌이 일어나는 法 , 느낌이 끝내 收斂處이니 느낌 좋도록 感覺하고 認知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생각이다.
✴ 위 幸福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幸 福을 決定하는 것이 結 局 생각임을 알 수 있다. 否定的으로 생각하면 不幸해지고 肯 定的으로 생각하면 幸福 해진다. [半 컵 사이다의 原理]는 人類 救援論의 하나이다. 半 컵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半 컵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差 異에서 人類 救 援論을 이야기하면 冷笑 的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事實이다. 아들이 數學은 잘하는데 英語는 잘못할 때 《내 아들은 數學은 잘하는데 英語 는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 아들은 英語는 좀 못하는 便이지만 數 學은 잘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의 差異에서 어떤 빛을 보지 못한다면 한 遺 憾이다.
5. 煩惱構造 論
相談家는 最優 先으로 스스로의 마음이 幸福해야 한다. 마음의 幸福을 가로막는 障礙 要因은 이것저것 많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살아오면서 스스로의 마음에 쌓아온 煩惱일 것이다. 곧 貪 瞋癡 三毒 이다. 이 煩惱에 對해서 잘 理 解하고 잘 淨化하는 일이 要請된다. 먼저 煩惱가 어떻게 發 生되고 熟成되고 굳어지는가를 理解해보고 다음은 煩惱의 淨化를 具體的 으로 어떻게 해낼 것인가를 理解해보겠다.
《1》 煩惱構造 人生이 幸福論 일 터, 幸福론 次元 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修心을 하려면 마음속에서 煩惱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어떤 構造로 存在하는가를 아는 것이 좋다. 여기에 紹 介하는 煩惱構 造는 佛敎에서 말하는 12演技의 다른 판이다. 十二緣起는 衆生 (사람)이 어떤 經路를 밟으면서 苦痛스러운 三世에 輪廻하는가를 열 두 段階로 나누어 說明하고 있다. 그 첫 始作 이 無明이다. 無名 이란 밝지 않음, 곧 어리석음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무엇인가? 事實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요, 理致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卽 人 生의 主體인 나(自 我)라는 것이나, 나의 對象인 色聲香味觸 法 等의 모든 것들이 緣起的 存 在로서 無我요, 非 我요, 空이요, 非實 體요, 無念無 相無住요, 無 有主客이요, 無 有定法이며, 中 道인데 그것들이 實體로서 存在한다고 여기는 것이 原初的인 어리석음, 곧 無明이다. 馬 鳴 大使는 大乘起 信論에서 無明을 端的으로 定義 하여 主客意識 (主客意識, 나 或은 너라는 생각)이라 하였다. 《番腦構造》는 12演技의 다른 판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整理한 理由는 煩惱 를 明瞭簡單 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煩惱構造 는 簡單히 《있다-좋다-싶다-썅》으로 생각하면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무엇이라 이름을 붙이면서 《있다》하고, 나아가 그냥 있는 것들을 《좋다》 或은 《나쁘다》 하니 [어리석음(癡)]이요, 없는 그것을 갖고 싶어 하니 欲求(貪 )요, 欲求韓 대로 잘 안 되니 ‘쌰~ㅇ’하는 忿怒(瞋)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人間 一般의 貪瞋癡 三毒 이다.
《2》 [槪念以前] 番腦構造 論議의 出發點 은 槪念以前 이다. 槪念이란 國語辭 典에 나오는 모든 單語이다. 사람 一般 이 世上을 認識 하는 方法의 基礎 가 槪念이다.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모두 槪 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 兄, 或은 동생이라고 개념화함으로써 삶의 便 宜度를 높인다. 그러나 이 槪 念化가 苦痛과 戰爭을 불러온다. 槪念 以前이란 무엇인가? 어떤 存在에 槪念을 附與하기 以 前의 狀態이다. 그것은 太 虛요, 太初요, 이브가 善 惡果를 따먹기 以前의 世上이요, 無心이요, 物自體요, 無念無相無 住요, 無有定 法이요, 自性이요, 如 如요, 如來요, 實 相이요, 無爲요, 無位이다. 사람의 意識은 鉛筆이라는 槪念을 選擇함으로써 無爲法 은 勿論이고 다른 모든 屬 性을 죽이고, ‘鉛筆’이라는 한 槪念에 固着됨으로써 硬化 過程에 들어선다. 곧 《分 別-是非-執着》이다. 分別是非執着의 結果, 人間은 苦 痛과 戰爭의 奈落으로 떨어진다. 槪念化 가 苦痛의 元祖 라는 것을 首肯하는 것은 큰 깨달음의 하나이다. 佛 敎式으로 말하자면 苦聖 諦와 集聖諦의 깨달음이다. 이에 地獄인 槪念 으로부터 벗어나 槪念以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當爲感을 느끼게 된다. 槪 念以前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요, 解 脫이요, 救援이다. ‘鉛 筆’이라는 槪念에서 ‘鉛 筆 移轉’으로 돌아가는 것이 救援이다. 이 論旨가 首肯된다면 이것은 解脫과 救援의 瑞光이 비쳐온다는 것을 意味 한다. 그러면 槪念以前 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槪念以前을 어떻게 把持해야 할까? 곧 ‘鉛 筆’이라는 槪念, 그 以 前의 그 存在 自 體는 무엇일까? 答은 簡單하다. ‘鉛筆’이 아니라, ‘鉛筆’이라 이르기 以前 의‘그것 自體’이다. 結論 부터 말한다면 그 어떤 것도 《그것 自體》(自 體, 實相: Ding an sich)는 그 어떤 式으로도 規定될 수 없는 無有定法이어서 無 爲의 風光으로 드러나 사람의 解脫을 결정지어준다. 凡夫는 《鉛筆》이라 槪念化하면서 그 《鉛 筆》이 《鉛筆 自 體》라고 믿는다. 그런 사람은, 西洋哲 學者들의 말을 빌리자면 素 朴實在論 者이다. 獨逸 留學에서 12年間 칸트의 著書, 純粹理 性批判을 硏究하여 博士가 되신 筆者의 哲學 스승의 말씀이 平生 記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素朴實在論 圈에서 사는 사람은 벌레와 큰 差異가 없다.”하신 말씀이다. 씹어볼수록 一理 있는 말씀임을 數없이 느껴온 바이다. 一旦 槪念 以前으로 돌아가는 것이 救援이요, 解脫 이라는 것을 거듭 귀띔해 둔다. 槪念以前 을, 解脫을, 니르바나를 經驗해야 하지 않겠는가! 《3》 [實體思考 ]
《槪念以前》에서 《槪念》으로의 첫 墜落을 實體思考라 한다. 곧 이름을 붙이는 心理過程을 말한다. 예: 나, 너, 그이, 그女, 冊床, 冊 ), 椅子, 사람, 動物 , 山, 하늘, 꽃, 개나리꽃, 나무, 자작나무, 哲學, 科學 , 宗敎, 하나님, 等等 等... 國語辭 典의 모든 單語, 모든 文 章이 實體思 考이다. 왜 이름을 붙일까? 그 어떤 것들이 사람의 삶에 어떤 意味, 어떤 價 値가 있으므로 사람끼리 그것들에 對해 원활한 意思疏 通을 위해 便宜上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목이 마른 아버지가 딸에게 “얘야, 물 한 컵 떠오겠니?” 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물》 , 《컵》이라고 하는 槪念이 約束되어 있지 않다면 딸이 아버지에게 물을 待令하는 行爲는 쉽게 期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槪念 自 體가 크게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現實的으로 必要한 便宜物이다. 便宜를 위해 만들어진 槪 念이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金剛經式 의 表現으로는 《컵 卽非 컵 是名컵: 컵은 컵이 아니고, 便宜上 일러 컵이라 함》 이다. 便 宜上 붙여진 이름이니 불러 쓰고 다시 놓으면 된다. 그런데 놓지 못하고 《分別-是非-執 着》을 하니 苦痛과 戰 爭이 따를 수밖에.
《4》 [價値思考]
그 單純한 듯한 《槪念》은 同時에 價値性 을 前提한다. 앞에 놓인 한 事 物을 ‘鉛筆’이라고 實 體로 規定할 때는 이미 어떤 意味, 어떤 價値가 있으므로 그렇게 槪念化를, 곧 《實 體視》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實體視(實體思考)와 價値詩(價値思 考)는 銅錢의 兩 面과 같이 서로서로 同時的 으로 前提된다. 어떤 事物 에 價値附與를 하는 程度만큼 그 事物에 對한 引力 또는 斥 力이 發生한다. 肯 定 價値는 끌어오려 하고 不正 價値는 排斥하려고 한다. 그 《人力 -斥力》의 程度 만큼 緊張이요, 스트레스요, 苦痛이요, 戰爭이다. 同事攝 工夫村 에서는 實體思考 나 價値思考 體系를 바로잡기 위해 非我 (無我) 冥想 을 勸奬한다.
《5》 [欲求]
欲求란 一旦 Needs를 前提하기는 하나 그 Needs의 周邊 에 形成되는 Desire가 欲求의 本質 이다. 나아가 欲求는 未成 熟한 審理(貪 瞋癡) 全體를 아우르는 槪念이다. 곧, 欲求 의 量이 많을수록 幸福量이 준다는 말은 未 成熟이 甚할수록 不 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欲求 最 少化 志向이란 非但 ‘欲求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모든 未成熟心理(염체)의 最少化를 志向함이다. 곧 欲求는 別途의 圖式으로 드러내는 煩惱 構造와 같은 槪念 이다. 煩惱構造 를 略式으로 整理 한다면, [ 있다 ? 좋다 ? 싶다 - 쌍 ? 不滿事 故 ]이다.
欲求의 特殊性 : 複雜한 煩腦構造 上의 欲 求란 特殊性을 지닌다. 天下의 平和를 깨뜨리는 가장 直接的인 要 因은 欲求(執 着)心理이다. 卽 이것 하나만 解決해버리면 平和 99%를 解決해버리는 것이다. 高爐, 未成 熟의 代表槪 念으로 欲求를 擧論하는 것이다. 價値 思考에 이어 欲求 라는 《싶음》의 마음이 일어난다. 欲求의 對 象은 많고 많다. 衣食住 , 健康, 돈, 權力 , 名譽, 사랑, 認定 , 知識, 工夫, 體能, 藝 能, 學問, 事業, 多樣한 技 術, 旅行, 購買, 等等. 가히 無數한 Needs이다. 人間 에게 欲求는 不可 避하고 當然하다. 그러나 欲求에는 自然히 緊 張 에너지가 서린다. 그 緊張 에너지의 强度가 어느 線 以上을 넘어서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欲求와 執着은 같은 質의 心理 現象 이지만 欲求에 스트레스가 서린 것을 執着 이라 한다. 卽 스트레스 程度만큼 執着이다. 여기에서 欲求란 最小限 以上의 執着이 前提된 槪念이다. [執着으로부터 解脫하기 위해서 《죽음冥想》을 한다.]
《6》 [忿怒]
欲求(싶음)는 實現되면 좋을 터이지만 願하는 대로 잘 안 된다. 100名이 다툰다. 누구나 1等이고 싶지만 99名은 떨어진다. 속이 傷한다(忿怒). 모든 欲 求에는 거의 忿怒가 따른다. 設或 欲求가 實現된다고 해도 그 實現 過程이 그지없는 緊張과 葛藤이요, 實現의 기쁨은 暫時일 뿐, 또 곧장 다른 欲求 의 마당에 들어섬으로써 卽時 緊張 -葛藤-忿怒가 일어난다. 忿怒는 過去의 火가 淨化되지 않은 채 抑 壓된 것이 있고 現在 일어나고 있는 것도 있고, 밖으로 表出되는 忿怒도 있으며, 밖으로 表現하는 忿怒도 있다. 忿怒에 相應하는 한두 가지 信念體系를 지닌 것도 좋다. ‘感情이 있을 때 表現하지 않는다.’‘화가 일어날 狀況이란 없다. 오직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行動할 것이냐가 있을 뿐이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忿 怒를 淨化하기 위해 《나知 事 冥想》을 한다.]
《7》 [不滿事故 (不滿思考: 不知足思考)]
無數히 反復되는 《欲求→忿怒》 의 審理過程에서 必 然的으로 派生되는 信念體系 하나는 ‘나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라는 《不滿思考》이다. 이 不滿事故는 幸福의 99%를 左右하므로 幸福 論에 있어서 깊게 注目해야 할 또 하나의 特殊 狀況이다. 사람이 不幸 한 瞬間에는 언제나 그 不幸 밑에 不滿思考 가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萬一 不滿 事故 하나만 完全 하게 剔抉해버린다면 不幸 은 99.99% 사라져버린다. 不滿事故는 다른 表現으로 不知足 思考 (滿足을 알지 못하는 思考 )이다. 곧 不滿事故 를 滿足事故 《知足事故》로 轉換하기만 하면 幸福의 99.99%가 解決된다는 뜻이다. 幸福 의 99.99%를 決定하는 것이 不滿 事故 如何라는 點 에서 不滿事故는 特殊性을 띤다. 그래서 幸福論에서 知 足이라는 德目은 大 書特筆하면서 注目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佛敎 의 重大 經典 인 遺敎經이나 法句經 等에는 少慾知足 이 힘주어 强調되고 있다. 知 足! 아무리 强調해도 넘치지 않는 德目이다. 簡單히 煩惱構造를 整 理 說明했다. 圖 表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煩惱構造를 佛敎의 《貪 瞋癡 三毒 》으로 整理한다면 實體思考, 價 値思考, 不滿 事故는 思考를 잘못하는 것이니 癡, 곧 어리석음이요, 欲求와 忿怒는 貪 과 瞋일 터이다. 鎭靜 至 高한 幸福解 脫을 願하는 마음 孔夫 人이라면 必히 이 煩惱 構造에 對한 깊은 洞察이 있어야 할 것이다. [不滿 思考에서 벗어나 滿足 할 수 있는 心理 狀態 가 되기 위해서는 《支族(監査)冥想》이 極히 좋은 方便이다.]
6. 마치는 말
幸福解脫을 主 題로 하여
《1》 只今 여기, 바로 그 幸福 解脫을 經驗 해야 한다는 것과 그 經驗을 하기 위해서는 相應하는 方便을 깨닫고, 方便을 慣行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2》 바로 只今 幸福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미 넘치는 所有 속에 있으니 넘치는 幸福 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 窮乏에 注 目하는 否定的 생각을 그치고, 豐饒, 곧 이미 있는 《旣存》과 이미 이룬 《旣成》에 注目하는 肯定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 解脫을 누리기 위해서는 存在 論 次元에서 緣 起요, 中道요, 頓 法임을 깨닫고, 그 어떤 것도 걸릴 것이 없다는 것을 首肯 함으로써 걸림 없는 解脫을 經驗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4》 마음을 느낌과 생각으로 나누어 보고, 느낌이 人生에서 目 的技能이요 생각은 그 目 的을 위한 手段 機 能이니, [느낌 좋도록 생각 잘 하기]가 全 人 生과 全 歷史 를 貫通하는 普遍 的 當爲임을 살펴보았습니다.
《5》 問道六章에서 살펴보았듯이 人生의 窮極 的 目的은 사람의 幸福解脫은 勿論이요, 모든 存在, 곧, 모든 動物, 모든 植物, 모든 無生物,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形體가 있는 모든 것, 形體가 없는 모든 것들의 幸福 解脫과 맑고 밝은 相生 氣運을 우리네 삶의 理想 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면 어떨까를 살펴보았습니다. 參考로 釋 迦牟尼의 觀 點 하나를 紹介합니다. [“낮은 次元 에서는 汚辱樂의 즐거움이 있고, 漸 漸 높아지는 즐거움이 있나니, 初禪의 즐거움, 二禪 의 즐거움, 三禪의 즐거움, 四禪의 즐거움, 空無邊處의 즐거움, 識無邊處의 즐거움, 無所有處의 즐거움, 非想非非想處의 즐거움, 마지막으로는 모든 느낌과 생각이 사라져버리는 受想滅의 즐거움이 있느니라.”]
《6》 군더더기 말입니다만,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主觀的인 觀點이요 價値 觀이니 그 말씀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서로 尊重하고 交流 함으로써 變化 發展 해 가는 것이 열린 歷史의 場이리라 믿습니다.
感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