頓忘의 길
들어가기
天下는 重重 緣起하는 하나의 有機 體다.
거친 눈으로 살펴보면 無水 아이템이 重重 한 關係를 가지면서 莊 重하게 흐르고 있지만섬세한 눈으로 살펴보면 텅빈 에너지 場이기도 하다.
사람은 이 緣起的 一 體性을 잊고 나와 너를 區 別하고 天下를 많은 수의 個體로 쪼개어서 認識 하면서 價値性을 附與한다.
나아가 限없이 分別, 是 非, 執着하면서 苦痛과 싸움을 빚어낸다. 이윽고 苦痛과 싸움은존재계의 屬性 으로 굳어져버렸다.
靈性系의 賢 者들은 世上을 苦痛과 싸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다양한 代案을 提示 한다.
삶의 現場에 雨後 竹筍 格으로 登場하는 그 代案들로 因해 만큼의 成果를 거두면서 歷史는 흐르고 있다.
그 代案 하나가 緣起 요, 空이요, 中道요, 頓 法이요, 道요, 하느님이요 하는 것이다.
同事攝은 佛 敎의 緣起, 空, 中道, 頓法 等을 頓忘이라는 깨달음 體系로 再定立되어 歷 史의 마당에 나와 있다. 再定 立이라는 次元에서 새로운 것이지만 佛敎의 頓法 等이라는 點에서 溫故知 新의 旣成品이다.
頓忘의 3W (What, Why, How)
뜻과 必然性과 方 法論
同事攝 一 般過程에서는 人生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價値 觀을 定立하고,중급과정에서는 助波 羅蜜 4 個를 實叅實修하며,고급과정에서는 槪念以前의 頓忘을 깨닫는다. [깨닫기 前에는 깨달음이 99%的으로 必要하지만, 깨달은 다음은 깨달은 것을 反復 觀照할 일이 99%的 으로 重要하다.]
What〈頓忘이란〉
頓이란 時間을 통해 이루는 漸의 무엇이 아니고, 時間 必 要 없이 時間超越 的으로 이미 그냥 있는 것을 發見(앎, 認 識, 깨닫기)만 하면 되는 무엇이라는 뜻이요, 忘은 없다는 뜻이요, 마음속에 something 으로 施設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頓忘은 이미 그냥 있는 something이되 마음 속에 相으로 잡혀 드는 무엇이아니라는 뜻이다.
解脫, 니르바나의 意識 이다.
一切에 걸림 없는 自由 意識이다.
頓忘이란 基礎 受 受容과 我空法空을 前 提한 옴나(깨어있음)이다.
頓忘은 槪念 以前의 意識이다.
達磨의 卽心 卽佛, 마조의 平常心是道가 그것이다.
Why〈頓忘의 必要 性〉
頓忘의 意識을 確保하지 못하고 槪念 圈에 머물러 있다면 [있다-좋다-싶다-썅]의 地獄놀음과 이에 相應 하는 싸움이 不可避 하다. 곧 頓忘의 있고 없음은 自由 의 있고 없음이요, 싸움의 없고 있음이다.
How〈頓忘을 깨닫는 길〉
頓忘三觀이 一旦 그 길이요, 方便 이 될만한 最小限의 人 文學的 知識이 바탕되어 있다면 좋을 것이다.
第 1 觀 [그냥 있음]
[그냥 있음]은〈分別 - 是非 - 執着〉없이 그냥 있는 것이다. 무엇이생각나면 그런 줄 알고 [그냥 있음]으로 돌아오면 된다. 생각이나 感情이 일어났음을알아차리고 그냥 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냥 있음’으로 있는 程度만큼 頓忘 이다. 事實은 第 1 觀 인 [그냥 있는다.]가 제대로라면 그것이 頓忘의 全部 이다. 그러나 實際로는 그냥 있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그냥 있음]에 補助方便 이 必要하다. 실은 補助 方便은 다양하게 있겠지만 頓 忘 2觀과 3 觀이 [그냥 있음]을 돕는 0番 補 助 方便이다.
第 2 觀: [我空 法空]
걸림 없이 그냥 깨어있는 것이 할 일 全部이다. 解 脫의 反對는 걸림이다. 걸림 없음이 解脫이다. 걸림이 問題이다. 곧 解脫을 하려면 걸림이 없어야 하고 걸림이 없으려면〈걸릴 것=""〉이 本來 없음〈 我 空法空〉을 깨달아야 한다. 눈과 귀를 열자마자 걸릴 것이 億萬 가지이다. 世 上이 온통 걸릴 距離이다. 어찌해야 할까? 億萬 가지 아이템들이 亂舞하는 世 上을 바르게 洞察하면 된다. 洞察 이 곧 悟(깨달음)이다. 小冊 子, [空](空을 깨닫는 27 가지길)을 깊게 吟味하면 될 것이다. 空은 解 脫論이자 人 類 救援論이라 했다.
第 3 觀: [ 現實 受容]
基礎受 受 容이 現實 受容의 0 番이다. [그냥 있음]이 相 當히 穩全할지라도 거의 自然的으로 [그냥 있음]을 妨害하는 心身의 컨디션이 흐르고 있는 法이다. 이 컨디션을 基礎受 라고 하는데, 거의 누구나 이 基礎受 를 自動的으로 抵 抗하게 된다. 달리 表現하면〈이중 화살〉을 쏘는 것이다. 이 境遇 基礎 受에 抵抗하지 않는다는 것, 곧 二重화살을 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重要하다. 卽 抵 抗하지 않고 基礎受를 그대로 受容해야 한다. 좋게 느끼는 基礎受는 끌어당기고 좋지 않게 느끼는 基礎受는 밀어내는 것이 普 通 사람들의 人之常情 이다. 끌어당기는 것이나 밀어내는 것이나 다 抵抗이다. 여기어서 힘주어 强調하는 것은 基礎受를 그냥 그대로 느끼면서 受容 해야 한다는 것이다. 基礎受에대한 理解를 깊게 하기 위해 [3段階 基礎受 哲學]을 參考하기 바란다. 나아가 모든 現實을 抵抗 없이 受 容하는 것이다.
不思善不 思惡
中國 禪佛 敎의 巨匠, 六祖 慧能이 五 祖 弘忍으로부터 法의 認可를 받고 南下하고 있었다. 衣鉢 을 빼앗고자 쫓아온, 弘忍의 弟 子이자 慧能의 師兄인 慧明스님께서 南下 하고 있는 慧能을 붙들고 法을 請한다. 慧能大 師는 [不思善不 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 目]라고 묻는다. 卽 善도 惡도 생각하지 않을 때 貴下의 本來面目( 本마음)은 무엇인가 하는 質問이다. 이 質問이 떨어지자 慧明 스님은 이윽고 깨닫는다. 어떠한가? 이 글을 接하시는 분이 바로 慧明스님이시다. 善도 惡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것이 있는가? 準備된 者는 이 質 問하나로 畵龍點睛을 할 수 있다. 사람은 主觀的으로 世 上에 存在하는 것들이나 일어나는 일들을 價値 評價 한다. 그러나 存在하는 [그것 自體 ]가 人間의 主觀的인 判斷으로 左 右되겠는가? 酸素가 善인가, 惡 인가? 酸素는 O2일 뿐 善도 惡도 아니다. 炭酸가스는 善인가 惡인가? 炭酸 가스는 CO2 뿐 善도 惡도아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은 [그것 自體]일 뿐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主觀 的인 렌즈로 屈折될 수 없다. 世上 次元의 어떠한 善, 或은 어떠한 惡도 어떤 次元에서만 善 或은 惡이라는 꼬리票를 붙이고 있을 뿐, [그것 自體]는 確 實히 價値로 換置될 수 없는 嚴正하고 崇嚴한 存在일 뿐이요, 어떤 規定 으로도 限定될 수 없는 超 越者요 無限卽非일 뿐이다. 이렇게 不思善不 思惡으로 깨어있을 때 應無 所住한 마음으로 而生其心 할 수 있고, 次元自在 한 마음으로 敏捷하고 輕 快한 菩薩行을 할수가 있다.
煩惱卽菩 提
不思善不 思惡과 같은 脈絡의 論意일 수 있다. 世 上 사람이 煩惱(貪瞋癡 等)라고 하는 것은 世上 사람들이 즐기는 어떤 次元의 論意일 뿐, 한 次元, 한 觀點을 달리하면 有形 無形의 그 어떤 存在 라도 煩惱로 規 定하는 것은 眞正 可當치 않은 論意 이다. 天下에 存在하는 有形無 形의 存在에 對해서 [A는 B다.]라고 規定할 때, 確實한 것 하나는 [A는 B다.]라고 宣言하는 宣言 主體가 前提 된다는 事實이다.
그런데 [A는 B다.]라고 宣言하는 그 宣言 主體는 A를 B로 等 値시키는 主觀的 基準을 內在 시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한 狀況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의 內在된 基準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결코(決코)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宿命的 現 實이다. 따라서 嚴正한 事 實 自體를 알고자 한다면 個人差를 宿命的으로 불러오는 主 觀性을 내려놓아야 한다. 主 觀性을 내려놓은 자리에 드러나는 것, 卽 煩惱라 이르는 것들의 [事 實自體]는 物自體(Ding ansich)요, 無有定法이며, 超越者이다. 物 自體(Ding an sich),無 有定法, 超越者等을 일러 菩提라 하는 것이다. 거듭 이르거니와 主觀 性 次元에서 煩惱라고 하는 것들은 主觀性이 내려놓아 졌을 때는모두 다 物自體(Ding an sich)요, 無有定法이며, 超越者로서, 바로 菩 提라는 聖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煩惱卽菩 提가 首肯되는 意識 境界에서는 天 下의 그 어떤 것도 걸림 없는 警戒요, 痕跡 없는 境界가 되어 식주체機能 은 宇宙的인 自由를 遊泳하게 되는 것이다.
槪念以前
世上을 槪念으로 規定하면서 보는 것이 더 제대로 일까, 아니면 槪 念으로 規定하지 않고 보는 것이 더 제대로일까? 勿論 槪念으로 規 定하지 않고 보는 世上이더 제대로일 것임은 當然하다. 只今 바로 人 爲의 槪念놀음이 없는 狀態로 바라
보라. 實相은 離言 이다. 槪念은 實相을 죽인다. 實相은 槪 念으로, 言語로 묶여질 수 없다. 實相은 言語를 넘어서 있다. 그러니까 思惟를 통해 “實相은 言語로, 思惟로 묶을 수 없는 것” 이라는 데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事由로 거기까지 갔을 때 따~ㄱ 느낌이 온다. 그 느낌이무엇인가? 無 限感, 解脫感이다. 思 惟로 갈 곳까지 가야 한다.
이윽고 無爲法에 이른다. 거기까지가 思惟의 使命이다. 그 다음부터는 言語道斷의 領域이다. 事由 의 領域이 아니고 느낌의 領域이다. 그때 열린 感, 解 放感, 니르바나 感이 온다. 言語道 斷이라 하니까사다리 自體까지 許容할 수 없는 것으로 理解하는 工夫 인이 많다. 禪宗의 많은 書 籍 곳곳에서는 莫存知 解, 不立 文字, 言語道斷 等의 말씀으로 思惟하는 것을 禁하는 듯한 가르침들이 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올바르게 理解해야 한다. 言 語道斷이라는 말은, 사다리를 오르는 過程이 言語 道斷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일은 思惟와 言語 를 活用하되 사다리 極點 에 올라가면 그 때부터는 더 以上 言語의 領域이 아니고 直觀하는 느낌의 領域이라는 뜻이다. 그러하니 여러분은 사다리 極 點까지는 사유를통해서 올라가야 한다. 思惟를 통해서 ‘이러이러하므로 緣 起로구나. 緣起이므로 區劃 지을 實體가 없구나.’ 하는 것이 理解되면 我와 法을 實體視하던 心 理가 놓이고 解放感이 느껴지는 法이다. 勿論 思惟의 길이 全部라는 것은 아니다.
物自體
結論的으로 世 上을 云謂하려면 世上 自體를 그대로 云謂해야할 터이니, 自身의 主觀 性을 排除하고 봐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살짝 自身의 主觀性(六 根等)이라는 主觀的인 필타를 제치면서 느껴보라. 이때 느껴지는 것이 어떠한가 보라. 여기에서 어떤〈아하!〉가 首肯되지 않는가? 그 아하의 境地가 思惟가 끊긴 느낌의 領域, 解脫 의 領域이다.
放下
손을 본다.
이때 나의 마음은 손이다.
손을 치운다.
손이 사라진 자리에 虛空이 드러난다.
이때 내 마음은 虛空이다.
虛空을 치운다.
이때 오직〈그것〉만이 의식된다.
〈그것〉은 純粹한 意識 이요, 眞正 스스로의 自 性이다.
〈그것〉을 表記함에〈옴〉.〈 純粹 意識〉,〈自 性〉,〈 本來面目 〉,〈頓忘〉,〈 無 限感〉,〈 解脫 感〉等이라 한다.
손을 치우고 虛空까지 치웠을 때 把持되는 Something 이 '아, 이 狀態를 말하는것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首肯되어지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龍陀가 天下 萬民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膳物이다.〈아하!〉하면서 首肯되는 바가 있다면, 그 아하의 內容이 되는〈그 狀態 〉가 좋은가 보라. 나아가 그 좋음이 絶對로 좋은가 보라. 그 좋음을 充分 한 論旨로 뒷받침해 보라. 손을 보면 내 마음은 손이요, 宇宙를 보면 내 마음은 宇 宙이다. 宇宙를 치워버리면 내 마음은 宇宙的인 빔이다. 마지막 빔까지 치운다. 그러면 이때는 무엇인가? ‘아, 이것이었네!’ 하고 어떤 首肯이 되는가? 아무리 치워도 치워지지 않는어떤 現傳물(現前 物)을 經驗하는가? 이것이 바로 혜명(慧命)스님이 잡았다는 本來面目 이다. 이 사다리를 통해 本來面 目을 捕捉했다고 하더라도 자칫 ‘本來面目 은 이것보다 훨씬 더 神秘한 그 무엇이 아닐까?’ 하면서 疑訝해 할지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案內대로 손을 보다가 손을 치우는 일부터 또박또박 다시 해보라. 안내대로 集中만 한다면 必히 無限感을 經 驗할 수밖에 없다. 以上의 여러 方便 들을 確實하게 觀行했음에도 不拘하고 無 限感이니 解脫感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는 助波羅蜜을 닦을 必要도 있다. 程度 의 差異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바보였던 주리반특카 메커니즘은 있을 수밖에없다. 先悟後修가 基本軌이지만 業障의 程度에 相應해서 先修 後悟의 패턴을 밟아야 할 境 遇도 있고 또 嚴正하게 보면 누구나 이미先修後悟를 基本軌로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先悟後修와 先修後悟가 自然스럽게 調和 를 이루도록 해야 하며 特殊한 1%의 境遇에는 先修 後悟를 基本軌로 한다 해도 다른 99%는 先悟 後修를 基本軌로 한다는 것이 龍陀家風 이다.
準備 된 者는 5分 내네 解決할 수 있다. 準 備된 者란,〈1〉正見 으로 길들여진 心理狀態〈2 無爲法의 삶을 意 味있게 여기는 心理 〈3〉解脫(걸림없는 自由感)에대한 動 機 〈4〉느낌에 눈뜬 程度 〈5〉마스터 信賴 〈6〉體驗 度에 執着하지 않는 心理 〈7〉 만큼 哲學의 바탕 〈8〉最 小限의 人文學 素養 (問道六章), 十二緣起, 觸受構造, 煩腦構造, 解悟解脫 五要, 不可不幸五段階 法理 等等)의 土臺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整理
그냥 있되(그냥 깨어있되) 基礎受가 受容되고 我空 法空이 確然하다면, 意識이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는 느낌, 곧 無限感, 解 脫感을 卽 覺的으로 느끼게 된다. 이 느낌이 自然스럽게 持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지만 길게 持續되기 어렵다. 구름이 낀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문득 太 陽을 보았더라도 太陽은 곧 구름에 묻히게 될 것이다. 頓忘 의 意識도 그러하다. 目 標는 긴 時間의 頓忘이 아니라 極히 짧은 時間의 頓 忘이다. 1 秒짜리 頓忘 을 잡아라. 그리고 斷續的으로 또 잡으면 된다. 反復해서 또 잡아라. 1 秒짜리를 잡았는데도 周邊에 障礙 物(煩惱)이 많아 1 秒 짜리 깨달음에 集中이 잘 안되더라도 에너지를 障礙物 쪽으로 돌리지 말라. 障礙(煩惱)가 있는 것은 當然하다. 過去 億萬 年을 그렇게 살았는데 只今 1 秒짜리가 되었다고 그것이 永遠하기를 바라는가? 只今 은 1 秒짜리라도 고마운 일 아닌가! 煩惱 와 다투는 것은 消耗戰이다. 그냥 다시 그것을 잡아라. 1 秒 --- 煩惱 --- 1 秒 또 煩惱 --- 또 1 秒 --- 또煩惱 --- 또 1 秒 --- 그런 鍊習(觀 行)을 反復하라. 鍊習量이 쌓이면 어느 瞬 間부터는 1 秒가 2 秒로 길어지고, 2 秒가 3 秒로 길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瞬間부터는 日常 事 삶 全般이 頓忘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眞正 體解 脫이다.
가끔 頓忘三觀의 1 觀에서 頓忘을 잡아버리면 基礎受 受容이나 我空法 空이 不必要하지 않겠느냐고 詰 問을 하는 修鍊生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無量劫을 我 空法空이 아니라 ‘我 有法有’로 살아오면서 我有法有 의 業障이 意識 깊숙이 內在 되어 있을 터, 그냥 깨어있음 程度로 頓 忘이 穩全할 것이라 여기는 것은 참으로 閑暇한 생각이다. 分明 基礎受 受容과 我空 法空을 거듭 거듭 觀行해가다보면 그 도움이 얼마나 큰가를 切 感하게 될 것이다.
頓忘은 옴나 (깨어있음)에 基礎受 受容과 我 空法空을 더한 것이라 했다. 이 깨어있음이란 唯識 軸이다. 無着, 世親이 나오기 前까지는 깨어 있는 意識은 別로 論議되지않고 空 만 强調되었을 것임은 當然 하다. 그러나 唯識思 想이 登場한 時代이니 만큼 空과 唯識이 調 和를 이루면서 觀行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을 것이라는 것도 當然하다. 同事 攝 工夫의 場에서 이 空과 唯識 의 兩軸을 한 흐름에 共存 시킨것은 多幸이 아닐 수 없고, 나아가 唯 識과 空에 基礎受 受 容까지 더하여 一味平 等한 意識의 흐름으로 統合된 것은 眞正 快擧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