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은 동사섭의 여러 過程에서 큰스님께서 직강하신 내용을 錄取, 整理한 것입니다. 큰스님 강의를 거듭 들으며 꼼꽁히 錄取하는 過程은 저에게 참으로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애쓰지 말고 그냥 있어 보라
그냥 있어보라. 지금여기, 그냥 있어보라. 그냥 있는 감이 들것이다. 그것이면 全部다. 거기에 補助道具가 하나 있다. 我空法空이다. 空理로 에너지가 샐 수 있는 곳을 完全 源泉 封鎖시키는 것이다. 空이라고 하는 이것은 慈悲 중의 慈悲이다.
이 世上에 空理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 多幸한 일이다. 空理가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모두 다 있게 된다. 實體가 있게 된다. 그래서 그 實體의 늪에 수없이 빠지게 된다. 그것에서 救援해주는 가르침이 바로 空理이다. 지금 네가 빠져 있는 그것은 없는 것인데 왜 있다고 여겨면서 빠져드는가 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大乘佛敎를 支配하고 있는 것은 그 空理이다.
이 宇宙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애쓰지 말고 淡白하고 便安하게 그냥 있어보라. 그냥 있는 것이 그냥 便安하니 좋다고 하는 程度만 되어도 똔망瞑想에 ◯票를 쳐보라.
釋迦牟尼와 나는 얼마큼 다른가
나는 釋迦牟尼와 얼마나 다른가, 한 번 瞑想해보시라. 釋迦牟尼의 피도 나의 피도 빨갛다. 釋迦牟尼도 손톱이 있고, 나도 손톱이 있다. 釋迦牟尼도 心臟이 하나요 나도 하나다. 나도 眼耳鼻舌身意가 있고 釋迦牟尼도 眼耳鼻舌身意가 있다. 가시에 찔리면 나도 아프고 釋迦牟尼도 아프다. 이렇게 같은 것이 거의 全部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 一旦 100점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라. 어디 100점만 될 것인가. 태어나서 무엇인가 좀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102, 103점이다. 그래서 109부터 道人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점수는 108.9점이라고 採點했다. 여러분이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거스르게 하는지 살펴보시라. 거스르게 한다면 自身을, 그리고 그 사람을 다시금 둘러보라. 釋迦牟尼는 110점인데 99%가 같다고 했으니 一旦 100점 以上으로는 보이지 않는가. 사람을 만났다 하면 가장 빠른 速度로 適應하시라.
태어날 때부터 100점이다
同事攝 寸鐵에 ‘適應이 解脫이다.’ 하는 것이 있다. 별 것 아닌 말로 들리겠지만 생각해볼수록 맞는 말이다. 여러분이 適應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제일 適應이 어려운 것은 아마도 사람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도 適應이 잘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굉장한 靈性 水位를 지닌 사람이다. 나도 사람에 걸리곤 하였다. 특히 나를 밉다고 하는 사람에게 걸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보든 그냥 한 그루 나무를 보듯이 걸리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건 함께 했을 때 便安하게 느껴지면 一旦 幸福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肯定的으로 보는 方法을 생각해냈다.
어떤 衆生이 부처가 된다면 어느 地點에서부터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普通 100점이 되어야 부처라고 생각한다. 0점에서 出發하여 100 점이 되어야 부처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대충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一旦 100점이다. 태어나자마자 100점. 그리고 그 100 점짜리가 平生 努力해서 부처가 되는데 부처가 完成되었다고 하면 完成된 부처는 110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0점이나 10점으로 태어나서 100이 되어야 부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90 이상 되는 目標를 향해서 뽀드득 뽀드득 올라가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태어날 때 100 점으로 태어나고 10점 努力해서 110점 이 되면 부처가 된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면 더 좋은가? 110 쪽이 단연 좋을 것이다. 내가 점수를 매겨보니 釋迦牟尼와 비슷하거나 같은 것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99.99가 釋迦牟尼와 같다. 다른 것이 조금 있다면 釋迦牟尼는 便安한데 우리는 걸린다는 그런 程度의 差異뿐이다.
마이너스 쪽 긴장, 플러스 쪽 긴장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낫다. 그러면 즐거움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고통은 마이너스 쪽의 긴장이다. 즐거움은 플러스 쪽 긴장이다. 플러스 쪽 긴장이 그나마 마이너스 쪽 긴장보다는 더 낫다. 그래서 苦受보다는 樂受가 더 낫다. 그렇다면 樂受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捨受다.
밑으로 긴장하는 것은 고통이고 위쪽으로 긴장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리고 즐거움은 中毒을 부른다. 어떤 特殊한 경우에는 고통 쪽으로 中毒되祈禱 한다. 그런 사람은 自害를 한다. 그것은 疾病이라고 할 것이다. 보통은 즐거운 쪽으로 中毒된다. 그래서 플러스 쪽 긴장에 길들여지고 中毒되면 그래야만 人生을 사는 것처럼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 흐름에 빠지는 것은 悲劇이다.
그런데 그 어느 쪽으로도 긴장이 없는 狀態, 中毒되지 않은 狀態가 있다. 그것이 捨受다. 이것을 水平情緖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捨受가 樂受보다 좋다고 하는 것이 價値觀 축으로, 그리고 실제로 體驗 축으로도 끄덕여져야 한다. 그것이 卒業狀이다. 그러니까 항상 價値觀과 體驗을 함께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룰 때는 中道的이어야 한다. 捨受가 더 낫다고 하니까 시도 때도 없이 捨受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道人도 춤을 추며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깨어 있는 狀態에서 즐거움을 누려야 道人이라고 할 것이다. 苦受에 길들여졌던 습은 樂受를 통해서 治癒되고 解決된다. 그러니까 무조건 捨受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충분히 즐거워지고 幸福해져야 한다. 그런데 한참 樂受 속에 있다 보면 이것은 좀 아니네 하는 단계가 필히 온다. 그것은 進化가 한 단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瞑想은 생각 水準을 높이는 練習
생각 레벨을 놓이는 것, 잘 생각하는 것이 瞑想이다. 잘 생각만 하면 내 안의 地獄과 밖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그래서 知足 생각을 잘 하고 非我 생각을 잘 하고 죽음 생각을 잘하고 나지사 생각 잘 하는 것이 동사섭의 수심 방법이다.
人間關係를 잘 생각해보자. 자祈禱 인간이면서 왜 인간과 부딪치는가. 그 놈과 부딪쳐서 내가 氣分이 좋지 않다고 하면 누가 손해인가. 氣分이 좋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내 氣分을 좋지 않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低質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氣分이 나빠진다.
낮은 水準의 생각을 높은 水準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瞑想이다. 바꾸는 방법은 理致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水準을 높이면 幸福 오케이, 解脫 오케이, 平和 오케이가 되는 법이다. 생각 水準이 다 決定해버린다. 동사섭의 고급 過程은 마지막 생각을 練習하는 修練場이다.
나의 겉모습은?
人品 속에는 겉모습도 들어간다. 그 겉모습을 인격이라고 한다. 겉모습의 첫 째는 우선 얼굴이 풍기는 印象이다. 물론 印象이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和顔愛語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얼굴 表情을 밝게 하는 練習을 하라. 내 印象이 부드럽고 맑은 印象인가를 살펴라. 얼굴 筋肉이 부드러워지면 엔돌핀이 나온다고 한다. 그 다음엔 言語와 行動이다. 表情, 言語, 行動을 잘 管理하라. 語默動靜行住坐臥가 여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유머가 있으면 좋다. 그 다음은 生動感이다. 말과 몸짓에서 生動感이 있어야 한다.
동사섭은 幸福論, 人品論, 共同體論이다. 동사섭 프로그램을 배우고 실천하면 幸福해지고 훌륭한 人品이 길러지고 내 가정이 幸福해진다. 이대로 살아가면 지구 공동체, 宇宙 공동체에 기여하게 된다. 여러분은 동사섭의 主人公이다.
人品 同心圓 3번, 共同體 意識
내 마음이 自由롭고 인격도 괜찮은데 全體를 보듬는 마음이 약하다고 해보라. 그것은 좀 아쉬운 일이다. 全體를 보듬는 마음, 동사섭 식으로 말하자면 大願之心, 이것이 내 마음의 自由, 내 모양새와 어우러져 人品을 이룬다. 여러분들은 공동체적으로 어떠한가. 얼마나 안아지는가. 宇宙 全體가 한 몸이라는 것이 確然한가. 내 공동체 사람들과는 어떠한가.
내 공동체 속에 미운 놈이 하나 있다면 그놈을 빼고 한 몸이라고 할 것인가. 내 職場의 미운 상사, 그놈은 빼고, 한 공동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이 다 공부거리이다. 人生은 人品論이다. 人生은 解脫論이요 共同體論이다.
人品 同心圓 2번, 인격
同心圓 두 번째는 인격이다. 인격은 人品의 部分集合이다. 인격은 모양새이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모양새를 떠올려 보라. 여러분들의 모양새가 아름다워서 스스로 尊敬되는 모양새인가 생각해 보라. 내 모양새를 떠올리면 氣分도 좋고 尊敬된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는가. 된다면 너무 좋을 것이다. 그런데 重要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내 모양새를 보아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그냥 好感, 尊敬心이 일어난다. 그러려면 言語가 다듬어지고 行動이 다듬어지고 궁극적으로는 人品 次元에서 안으로 마음이 다듬어져야 훌륭한 人品자라 할 것이다. 내 마음이 한없이 自由롭고 慈悲롭고 自在로우며 인격 次元에서 내 겉모양새도 괜찮다면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음공부를 해야 되지만 言語 管理며 行動 管理도 해야 한다.
걸림 없음, 人品 同心圓 1번
동사섭의 전 過程은 人品에 대한 靑寫眞이다. 그 人品 同心圓 제일 안쪽에 自由가 있다. 그것은 解脫이다. 무엇이 自由인가. 法理를 理解할 때는 더 이상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곳까지 밀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自由란 무엇인가.
自由는 내 識主體 기능이 객체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말은 대단히 쉬운 것 같지만 이것이 人品으로 영글어들려면 뼈를 깎는 努力을 해야 한다. 自由란 境界에 걸리지 않는 德性을 말한다. 境界에 걸리지 않는 것이 대수일까. 여러분이 혹시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걸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瞑想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걸림은 바로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걸린다는 것은 執著한다는 것과 같다. 執著하면 괴롭다.
그래서 自由, 解脫이라고 하면 그 에센스 概念은 걸리지 않는 것이다. 걸림 없음, 應無所住, 무념(無念), 無常, 무주(無住), 등등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至高한 人品이 되었을 때는 여러분의 마음에 어디에도 일체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適應이 解脫이라는 말이 나왔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미운 놈이 나타났다. 이것은 여지없이 걸린 것이다. 解脫했다고 하면 미운 놈 자체가 사라진다. 여러분들은 미운 놈이 있는가, 미워해봐야 내가 손해다. 걸림이 없다고 하는 이 단순한 말씀이 여러분 속에 活句로 꽂혀야 한다. 내 마음이 境界에 걸림이 없다, 이것이 얼마나 큰 主題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境界에 걸림이 없는 것, 그것이 解脫이다. 그것이 至高한 人品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첫 概念이다. 걸림 없는 마음이 되면 거기에서 慈悲가 나오고 自在가 나온다. 自由 속에 慈悲와 自在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라.
동사섭, 人品의 설계도
宇宙의 歷史는 進化의 歷史이다. 宇宙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어떤 식으로든 無常하게 변화 발전해가는 過程에 인간이 어떻게 해서 進化해 나온다. 이 인간이 宇宙 太初부터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지구 위에 언젠가 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살기 시작했던 무렵이 어떤 모양새였을까.
人生을 人品論이라고 하면 그 속에는 幸福論, 人格論, 共同體論이 다 들어가 있다. 여러분들 속에 至高한 人品을 지향해가리라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가. 여러분은 至高한 人品자가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전 宇宙를 考慮하는 의식을 갖추면 좋지 않겠는가. 한번밖에 없는 人生을 천박하게 굴리다 가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을 그럭저럭 굴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品格 있게 굴리다 가면 좋지 않겠는가. 이 삶이 한번만으로 끝나버린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品位 있게 살다 가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人生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이 생을 적당히 살아야겠는가, 아니면 다음 세상을 위한 준비의 過程까지 생각하며 살아야겠는가. 다음 생을 위한 준비 過程으로도 살아야 한다. 今生은 來生, 來生, 來生을 위한 機會의 장이다. 이 機會의 장을 잘 活用해서 나의 人品 水準을 이 정도로는 올려놓겠다고 하는 마음을 딱 가져주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人品 水準을 블랙 벨트로 높여 보자.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人品 水準을 높이는 것인가. 그 대안, 그 설계도로 해서 동사섭만한 것이 없다. 동사섭은 불교가 주 교재이나 宗敎를 뛰어 넘어 다른 文化권의 인문학까지 끌어다 불교 것과 합해서 발효시킨 것이 동사섭이다.
人生은 幸福論, 人品論, 共同體論이다
人生은 무엇인가. 아침부터 밤까지의 삶, 한 살부터 백 살까지의 삶, 그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幸福을 지향해가는 幸福論이다. 그리고 人生은 人品論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人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선 사람의 모양새가 떠오른다. 모양이라고 하면 겉모양과 속모양이 있다. 겉모양은 몸뚱이 쪽 모양으로 떠오르고 속모양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 다양한 德性이 떠오른다. 사람의 삶이란 자기의 모습管理해가는 過程이 아니겠는가. 평생 자기 모습을 管理 하다 가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삶은 人品論이라고 해도 좋다.
또 人生이란 共同體論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의 한 생을 보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산다. 태어나는 瞬間, 누구와 함께 하였는가. 어머니와 함께 하였다. 그 다음 家族과 함께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 그리고 親舊들과 함께 하였다. 우리는 매일 더불어 있다. 關係, 함께 함, 이것이 人生의 중대한 德性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더불어서 잘 살아보자, 우리 家族들, 우리 職場, 우리 社會, 우리 國家 더불어서 南北 더불어서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人生은 共同體論이라고 해도 좋다.
原理가 대가를 낳는다
동사섭에는 原理가 대가를 낳는다는 寸鐵이 있다. 사람은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있다. 이 말씀이 바로 原理를 뜻한다. 이 세상은 아날로그로 꽉 차있다. 그리고 그 아날로그 속에는 바둑판보다도 더 치밀하게 디지털이 있다. 그런데 그 原理 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냥 아날로그이다. 秩序, 理致 등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두루뭉술하게 그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그대로 세상이다. 그런데 知性축으로 賢明하게 생각하는 智慧를 지닌 사람은 펑퍼짐하게 열려 있는 아날로그 속에서 어떤 理致를 본다. 그 理致, 그것을 原理라고 한다.
동사섭 수련회에서는 그 原理를 공부한다. 사람의 마음은 두 축으로 되어 있다. 느낌은 目的축이고 생각은 방법축이다. 방법이 좋으면 그 결과로 느낌이 좋아진다. 여러분이 동사섭에서 배운 原理, 瞑想, 그것은 생각축이다. 생각을 다른 말로 思惟, 思索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생각을 스무 가지 정도로 이야기한다. 그중에서 代表的인 것은 思惟, 思索이다. 그것은 瞑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말만 다를 뿐이지 다 같은 뜻이다. 瞑想은 곧 思索, 思惟이다, 여러분은 동사섭 수련에서 생각을 한다. 무엇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가. 돈망에 대해, 知足에 대해, 無我, 죽음 그리고 나지사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잘 하면 이 마음에 解脫感이, 幸福感이 차오른다. 아직 별 느낌이 없다고 하는가. 그러면 그 생각을 反復하라. 모든 감각인지 過程에는 그에 相應하는 느낌이 오게 되어 있다.
동사섭의 修心體系
동사섭 主波羅蜜은 돈망 瞑想, 주助波羅蜜은 知足, 非我, 나지사, 죽음瞑想 등 4개이다. 波羅蜜이라는 말은 方便, 방법, 뗏목이라는 뜻이다. 이 언덕에서 강 건너 저 언덕으로 가려면 뗏목이라는 道具, 方法論이 필요하다.
동사섭의 주方便인 돈망이 確然해지면 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있던 마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와 세상과의 間隔이, 나와 저 쪽과의 境界가, 限界가 사라져서 宇宙가 된다. 宇宙가 내가 된다.
助波羅蜜 1은 知足 瞑想이다. 知足 瞑想은 幸福의 99%를 決定한다. 助波羅蜜 2번은 非我 瞑想이다.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 내가 아니라는 철학이다. 이것을 瞑想적으로 다루어서 우리가 體驗을 해야 한다. 非我를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몸으로 느껴야 하다. 3번 助波羅蜜은 나지사瞑想, 4번 助波羅蜜은 죽음瞑想이다.
그리고 나머지 무수한 細波羅蜜이 있다. 細波羅蜜은 주조 波羅蜜을 뺀 나머지 전부이다. 숨 쉬는 것, 밥 먹는 것, 다리로 걷는 것 등등 모두가 細波羅蜜이다. 여러분을 幸福하게 해주는 것 중에서 주조 波羅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모두 細波羅蜜이다. 절에 가고 敎會에 가는 것도 細波羅蜜이다, 그러니 細波羅蜜이 훨씬 더 重要하다. 細波羅蜜이라고 하니까 重要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細波羅蜜이라고 하여 주助波羅蜜 아래에 두는가. 그것은 누구라도 이미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細波羅蜜의 1번을 말하라고 하면 健康 波羅蜜이다. 이것이 동사섭 수심 體系이다.
癡貪瞋 3독
사람의 欲求(needs) 자체는 탐(desire)이 아니다. 그런데 이 欲求의 現實을 보면 어떤 水準이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 마음은 平靜한 狀態다. 그런데 그것을 꼭 끌어와야겠다고 하면서 어느 선을 넘게 된다. 그래서 欲求가 執著이 되면 그것을 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지 않는 欲求의 경우는 엔돌핀을 나오게 한다.
그런데 欲求 對象이 생겼다 하면 現實적으로 그 欲求가 선을 넘지 않기가 힘들다. 道人들이나 그 선 안에 머문다. 道人이 아닌 경우는 전부 그 속에 빠져 들어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그것이 탐이다. 그 탐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憤怒가 된다. 그 欲求에 대해 ‘努力했는데 안됐어.’ 하면서 웃고 말 수도 있다. 그런데 欲求가 熾烈해서 탐이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속상한 心理 狀態는 憤怒,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癡貪瞋을 3독이라고 한다.
동사섭 煩惱構造의 理解, 이것은 마음공부에 굉장히 重要한 밑바탕이 된다. 우리 마음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그런 心理는 健康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貪瞋癡는 어떤 식으로든 淨化되어야 한다. 그 方便이 바로 동사섭의 1개 主波羅蜜과 4개 助波羅蜜이다. 主波羅蜜인 돈망瞑想은 概念以前의 의식 狀態를 確認하는 瞑想이요, 知足병상은 不滿思考를 淨化하고 非我瞑想은 實體思考와 價値 사고를 淨化하며 죽음瞑想은 탐을, 나지사瞑想은 진을 淨化하는 方便이다.
세 가지 惡思考, 세 가지 어리석음
引力이든 斥力이든 그것은 어떤 싶음, 欲求를 말한다. 그런데 그 欲求가 뜻대로 成就되면 氣分이 좋지만 挫折되면 속이 상한다. 여러분들의 欲求는 잘 成就되는 쪽인가. 대부분 잘 되지 않는 것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속상한 그 마음이 憤怒이다. 實體思考-價値思考-欲求-憤怒. 이 過程을 몇 번이나 反復하겠는가. 수도 없이 反復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欲求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憤怒가 터진다. 또 憤怒, 또 憤怒, 憤怒…. 이러한 過程에서 한 가지 사고가 發達한다. 해도 해도 成就되지 않는다는 ‘不滿思考’가 그것이다. 그 不滿思考가 實體思考, 價値思考 밑바탕에 깔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實體思考, 價値思考, 不滿思考를 3大 惡思考라고 한다.
이 3大 惡思考가 바로 어리석음이다. 概念 이전인데 자신이 공연히 概念化를 시켰으니 어리석음이요 본래 價値를 떠나 있는 것인데 價値가 있다, 없다 하고 생각하니 어리석음이다. 또한 따지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축제요 축복이요 한없는 肯定性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자기가 갖지 못한 부분만을 생각하면서 不滿을 하고 세상 전부를 끌고 들어와 不滿을 하니 어리석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치는 바로 이 3大 惡思考를 말한다.
實體思考와 價値思考, 동전의 양면
어떤 對象에 이름을 붙였다고 하면 그 이름은 일회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反復된다. 反復되고 反復되면 그것이 내 속에 습으로 변한다. 눈을 뜨자마자 “어머니!” 하였다. 實體思考를 한 번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라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 하겠는가. 그러니까 어머니라고 하는 그 概念이 골수에까지 박히게 된다. 그래서 實體시가 反復되면 그것이 딱딱한 것으로 변해 내 의식을 옥죄게 된다.
그런데 實體思考가 되었다고 하면 그 實體가 無心하게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價値성을 띄게 된다. 그리고 애초에 價値성을 賦與하기 때문에 實體시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瞑想을 조금 해보면 참으로 그러함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價値 次元에서 意味가 전혀 없는 것은 실제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이름을 붙였다 하면 그 밑에는 價値思考가 前提되어 있는 법이다. 論理的으로 實體思考 다음에 價値思考를 이야기할 뿐이지 現實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에 컵이 있다. 그리곤 곧장 ‘컵이 예쁘네, 얼마짜리일까’ 하고 價値思考에 들어간다. 아니면 ‘컵에 왜 이따위 그림을 그려놓았지?’ 하면서 否定的 價値로도 바라본다. 實體 사고로 그 존재성이 드러나면 그것은 곧바로 價値성으로 遁甲한다. 그래서 플러스 價値는 끌어오려고 하고 마이너스 價値는 排斥하려고 한다.
‘쓰레기’라는 實體가 떴다. 그러면 아, ‘더러운 쓰레기’ 하면서 否定價値가 賦與된다. 그러면 그 쓰레기를 얼른 없애버려야 된다. 그래서 引力 내지 斥力이 바로 나온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는 모습이다. 스스로가 사는 모습을 이렇게 整理해본다는 것은 重要한 作業이다.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人生을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客觀的으로 整理해볼 필요가 있다.
實體思考, 추락의 첫 단계
幸福을 막는 것은 煩惱이다. 그러므로 煩惱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식으로 똬리 틀고 있는가를 理解할 필요가 있다, 煩惱의 發生 構造를 理解해야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아무 생각 없이 無心하게 깨어 있어보라.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概念以前으로 그냥 있는 것이다. 그 狀態에 있다가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라. 어머니를 떠올려 보라. 아니면 눈앞에 있는 어떤 對象을 보며 그 이름을 말해보라. 그리곤 보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라.
사람들은 눈을 뜨고 對象을 보면서 “컵!”이라고 한다. 컵이라고 이름 붙이는 活動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라고 하는 概念化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實體思考이다. 그것이 墮落의 第一步이다. 이브가 善惡果를 딱 따먹은 瞬間이 바로 實體思考의 瞬間이다. 善惡果를 따먹었다는 것은 내 識主體 기능이 識客體를 떠올리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識主體가 識客體를 잡고 생각하는 作業을 하기 이전의 마음, 主客 活動 이전의 마음을 概念以前, 無心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음속에 속에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은 狀態를 말한다. 主客活動을 할 때는 마음속에 念體가 생기게 되어 있다. 마음속에 이런 念體가 생기기 이전, 概念 이전을 反復하여 練習해 보라.
이 無心에 통하지 않고는 자나 깨나 主客 놀음, 概念 놀음을 하게 된다. 概念 놀음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이 심한 表現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無心을 통하게 되면 이 말이 그대로 理解가 될 것이다.
느낌 공부, 수용과 지향
여러분들이 엔카장에서든지 人生살이에서든지, 氣分이 상했다고 하면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생각을, 氣分을 상하게 한 그 생각을 氣分이 좋아지도록 하는 생각으로 바꾸면 된다. 내가 꼬였을 때는 왜 꼬였는가. 꼬이도록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저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꼬여버렸거든요.’ 하는 경우가 經驗的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深層的으로 分析해 들어가면 끝내는 생각이 그것을 決定했음을 理解하게 될 것이다.
相對방이 나에게 攻擊을 해서 화가 났다. 그 때는 생각을 轉換해야 한다. 생각 轉換은 어떻게 하는가. 우선, ‘저 사람이 나에게 여처저차 하는 구나,’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구나, 겠지, 감사는 威力 的인 생각이다. 나지사는 우리들의 모든 감정을 純化시킬 수 있는 藥材가 된다.
그래서 엔카장에서든, 現實에서든, 그 무엇 때문에 감정이 상했다면 그 狀況을 ‘구나’로 건너다보면 다 수용이 된다. 그리고 ‘~겠지’ 하면서 그럴 만한 사정 쪽을 考慮한다면 理解까지 되어서 느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그만하니 감사하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그만하니 감사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좋지 않은 느낌을 오래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 어떤 좋지 않은 느낌도 일단 수용하라. 그리고 더 높은 쪽으로 轉換해 가라. 수용과 지향, 이것은 느낌뿐만 아니라 人生의 모든 局面 局面에 필요한 기본적인 原理의 하나이다.
잘 읽고, 잘 생각하고, 잘 理解하기
人類 精神 活動의 성과물은 모두 글로 갈무리되어 있다. 모든 宗敎, 모든 學問, 모든 文化는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뜻을 글로 갈무리하고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祈禱 한다. 그래서 어떤 宗敎, 學問, 文化 등등을 理解하고자 하면 사람들은 그에 相應하는 책을 찾고 그 글을 읽는다. 그러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意味할까? 그것은 그 글의 뜻을 생각하고 理解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눈으로 글자만을 쫓아간다고 하면 구태여 그 책을 읽을 까닭도 없다. 그 글이 바이블이든, 四書三經이든, 純粹理性批判이든, 宇宙科學書이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要請한다.
八萬大藏經이라고 지칭되는 불교 經典들도 물론 책이고 글이다. 그러니까 불교 經典들도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要請하고 있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宗敎인 불교의 經典들은 모두 그 글을 읽는 이를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즉, 니까야든지. 金剛經이든지, 般若心經이든지. 그 經典을 읽는 이가 그 글을 읽어가면서 잘 생각하고 그 뜻을 잘 理解해 가면 깨달음의 자리에 到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昨今의 한국 불교 風土에서는 생각하는 것은 乾慧地라고 하면서 三昧만을 強調하고 있다. 그렇게 三昧 一邊倒로 三昧만을 強調한다면 문자로 쓰여 있는 八萬大藏經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八萬大藏經은 그저 乾慧地의 集積物이라는 것인가. 經典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經典을 읽어가면서 잘 생각하고 잘 理解할 것인가, 아니면 三昧를 할 것인가.
離苦得樂, 불교의 1번 基準
불교의 基準을 무엇에 두면 좋을까. 佛敎人들, 특히 知識人이나 智慧 水準이 높은 佛敎人들은 불교를 살아갈 때 그 基準을 正法이 무엇이냐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95퍼센트 이상이 正法이 基準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法執이 나오게 된다. 물론 正法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正法’에 대한 觀點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正法이라는 것을 엄격한 基準으로 삼게 되면 觀點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相對의 것을 正法이다, 아니다 하면서 法亂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正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편리하다. 그런데 正法이라는 基準을 힘주어서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나 덜 바람직하다.
그래서 요점은 正法을 基準 1번으로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正法은 좋으니까 正法 지향을 하되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基準으로 하고 첫 번째 基準은 離苦得樂에 두면 된다. 그리고 불교의 基準을 離苦得樂이라고 해 놓으면 다른 모든 思想, 다른 모든 宗敎들과도 함께 어깨동무를 할 수가 있다. 人類사의 모든 文化 文明은 人類의 幸福解脫에 服務하는 道具들이 아니겠는가. 불교의 基準이 離苦得樂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말하면 불교 또한 ‘眞理’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離苦得樂에 도움이 되는 道具, 方便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修練生들에게 ‘眞理, 眞理하지 말고 方便, 方便 하라“고 하는 方便 불교를 전하고 있다.
經典을 배우기 전에 우선 삶을 생각하라
金剛經과 삶. 金剛經이 더 重要한가. 삶이 더 重要한가. 삶이 더 重要하다. 金剛經은 삶이라고 하는 거대한 範疇 속에 部分集合으로 있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삶이 中心이다. 그러니까 四聖諦 十二緣起 八正道도 삶 次元에서 풀어가라. 經典에서 삶을 풀어내려고 하지 말고 삶으로부터 經典을 풀어가라.
그러면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의 삶. 70억 人類 중에 等覺, 妙覺으로 임재하고 계신 분이 몇 분이나 있겠는가. 일단 없다고 보면 된다. 이 말은 妙覺佛이 離苦得樂의 完成者라는 것이다. 妙覺佛이 아니라면 그만큼 괴로움 속에 있다는 말이다.
삶이 本質은 고이다. ‘나는 幸福한데요’ 한다면 그것은 좋다. 그러나 妙覺佛과 같은 完璧한 幸福 次元에서 볼 때는 그 人生은 시커먼 地獄이다. 妙覺次元에서 볼 때는 人生이, 삶 자체가 바로 고이다. 그래서 불교는 고에서부터 人生을 풀어간다. 그래서 삶의 目的을 離苦得樂이라고 한다.
◯票 치기, 살아 있는 修行
맨입으로 할 수 있는 最高의 作善이 있다. ‘九類 衆生을 다 濟度하리라’ 하고 한 번 大願之心을 일으켰다고 하면 最高의 作善을 한 것이다. 九類 衆生이시여, 幸福解脫 하소서. 나는 그 九類 衆生을 다 濟度하여 無餘涅槃에 들게 하리라. 그렇게 祈禱 한번 하고 作善에 ◯票를 쳐도 좋다.
運動도 에너지를 쓰면서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음 일으켜서 運動 效果를 얻을 수 있다. 여러분들이 130세까지 健康, 幸福, 長壽하게 되어 있다고 관해보라. 그러면 아마 氣分부터 좋을 것이다. 참으로 130세까지 長壽할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게 관할 때 現在 幸福하지 않은가. 運動 次元에서 자신이 130세까지 健康 長壽하는 모습을 想像하면서 늘 幸福해지시라. 이렇게 ◯票치기 하는 것이 살아 있는 修行이다.
生死一如가 될 때까지
나는 죽음瞑想을 ‘온다. 간다. 걸림 없다.’로 한다. 죽음이 왔다고 생각할 때 그 죽음이 두렵다면 그것이 걸리는 것이고 그 죽음을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편안하게 맞이하게 되면 그것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죽음이 왔다고 할 때 돌아보면서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죽음瞑想의 最高 버전은 본래 生死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죽음 瞑想의 初期에는 가장 素朴하게 무엇인가 해야 할 것들에, 이루어야 할 것들에 걸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은 生命 자체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죽음이 편치 않았던 歷史的 事例가 있다. 秦始皇이다. 그런데 秦始皇보다 열 배나 걸려서 죽음을 꺼려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釋迦牟尼다. 釋迦牟尼는 바로 죽음 때문에 出家를 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죽음瞑想을 거듭해서 ‘온다. 간다. 걸림 없다.’가 되도록 하라. 생하고 있으나 사하고 있으나 똑같이 느껴져야 한다. 生死一如가 되어야 한다.
나는 죽음 瞑想을 다 뚫었다고 하는데도 남아 있는 마지막 念體가 있었다. 그것은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 肯定的 心理였다. 그 念體, 참 不快하다. 그런 것까지 다 털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捨受가 妙覺인줄 알면 生死一如가 된다.
全體가 한 물건이거늘
나의 平和를 根本的으로 망치고 있는 것은 이 自我, 利己心이다. 이 自我를 뛰어 넘으려면 非我觀, 無我觀을 하라. 緣起가 있을 뿐, 어디에 自我가 있느냐 하는 것이 받아들여지는가.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깨끗한 非我觀이다. 重重緣起 하는 한 有機體가 있을 뿐, 어느 부분을 끊어서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마음이 익어들어야 한다. 이 非我를 吟味하면 뼛속까지 좋다.
나의 過去史를 보면 自我에 集中되어 있던 한없는 歲月이 있다. 지금도 완전히 自我에 集中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문득 自我에 集中되는 瞬間이 있다. 그런 때 얼른 精神을 차린다. ‘나’라고 하는 이 自我는 獨立된 實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確然해지면서 이 存在界는 自我 이야기를 하기로는 너무도 한 덩어리이다. 全體가 한 물건이다.
그 때 확 열리는 이 狀態, 굳이 ‘나’라는 이름을 붙여야 된다면 그냥 열린 全體가 한 ‘나’일 뿐이라는 狀態가 된다. 그것을 한 번 느끼고, 두 번, 세 번, 거듭 느껴 보라. 그러면 어느 瞬間, 내가 過去에 나, 나 나, 하면서 利己的으로 나에게 集中하였던 그 時節에 대해 그저 回心의 微笑가 지어질 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非我 瞑想을 하면서 自我로부터 훨훨 벗어나라.
훨훨 벗어난 그 마음으로 便宜상 自我 놀음을, 菩薩道를 하는 것이다. 宇宙는 重重緣起 하는 全體가 있을 뿐, 어디를 끊고 區劃지어서 ‘무엇!’이라고 할 것이 없다. 過去의 나는 이미 지나갔으니 없고, 未來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으며 現在의 나는 刹那 無常이니 없다. 現在의 나는 있다고 하려는 刹那 그 現在의 나는 억만 분의 일초 사이에 過去로 가버리고 없다. 그러니까 現在의 나도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現在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것은 무엇인가. 過去의 殘像이다. 자, 非我瞑想에 동그라미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