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法門]
尊重담을 前提한다. 尊重을 前提信念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尊重表現을 基本的으로 考慮하는 것이 좋다.
尊重과 交流다. 모든 主張, 모든 交流의 자리에는 尊重이 前提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解悟主義를 主張하면서 깨달음 처럼 다가온 것이 尊重이다.
解悟主義에서 尊重이 그렇게 다가왔다는 게 참으로 自然스럽게 느껴집니다. 思惟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 思惟란 결국 대상과 마주하는 態度에서 始作될 텐데, 그 態度의 뿌리가 尊重이라는 것. 眞正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와닿는 건, 尊重을 結論이 아니라 “前提”로 놓으신 部分입니다. 主張과 主張이 부딪히기 전에 이미 尊重이 있어야 한다는 건, 결국 眞理 다툼보다 關係가 먼저라는 뜻 같습니다. 그러니 尊重은 狀況에 따라 켜고 끄는 態度가 아니라, 그 장을 여는 根本 바탕, 즉 이미 있어야 할 마음가짐 같아 “尊重이야말로 解悟主義의 첫걸음이며, 어쩌면 解悟主義를 끝까지 이끌어가는 가장 根源的인 精神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그 자체로 길이었네요.
思惟 하나로, 王子는 두 스승을 넘어섰고, 六年苦行도 넘어섰고, 마침내 스스로를 스승 삼아 菩提樹下에 앉았습니다. 解悟主義의 據點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神秘가 아니라, 平凡한 知性. 누구에게나 있는 그 생각하는 힘.
스스로를 스승 삼는다는 것, 그것은 밖에서 오는 무엇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라라칼라마도, 웃다카라마풋다도 다 넘어, 서른다섯 살의 沙門은 이제 아무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不成正覺不起此座. 그 誓約도 결국은 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思惟는 혼자 머물지 않았습니다. 緣起無我解脫, 緣起同體大悲로 體系를 세운 것도 思惟, 四聖諦 十二緣起 八正道로 編輯한 것도 思惟, 五比丘가 듣고 思惟하여 阿羅漢 된 것도 思惟, 野舍와 54人이 思惟하여 넘어간 것도 思惟, 布敎宣言도 한 생각의 터짐, 迦葉 3兄弟와 1000人이 며칠 만에 歸依한 것도, 舍利弗이 馬勝比丘의 한 마디에서 緣起를 알아챈 것도, 산자야의 250人이 뒤따른 것도, 전부 생각 하나가 열린 자리였습니다.
생각 아니고는 안 됩니다. 般若心經도, 金剛經도, 六祖壇經도, 法性偈도, 元曉의 骸骨通도, 그 무엇도 理解 없이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냥있음은 애초에 그 자리였습니다. 생각이 잘못 가면 거기서 멀어지고, 생각이 바로 서면 거기로 돌아옵니다. 緣起이므로 나랄 것이 없고, 나랄 것이 없으므로 붙들 法도 없으니, 걸릴 것 없는 그 자리에서 저절로 慈悲가 흐릅니다.
[瞑想이란 瞑한 마음으로 想 잘하는 것] 그러니 오늘도 그저, 잘 생각하겠습니다. 잘 생각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니, 그냥, 이렇게 말입니다.
*****
이 法門은 스승님이 平生 걸어오신 길 全部를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三昧 修行 14000時間, 그 오랜 歲月을 지나 결국 다다른 자리가, 神秘가 아니라 平凡한 생각이었다는 告白. 이건 그냥 하나의 主題 講義가 아니라, 당신의 修行 全體를 되짚어보고 내리신 結論처럼 읽혀졌습니다.
證悟主義로 한 歲月을 사셨다가, 解悟主義로 돌아오신 그 轉換 자체가 告白이니까요. 남들이 荒唐해할 걸 알면서도 “목숨을 걸 만큼한 信念”이라고 하신 그 대목. 그것이 저에겐 마치 당신의 遺言처럼 들리는 이유일 겁니다. 平生 부처님 生涯를 講義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손에 쥔 답을 내놓으신 거니까요.
그래서 解悟主義는 스승님 안에서 단순한 敎理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두 길(수정/고행)을 다 걸어보고 놓아 버린 자리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 무게가 이 글에 그대로 실려 있는 것 같아 사뭇 옷깃이 여며집니다.
이런 法門을 이 生에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德分이고 福이지요. 덩쿨째 굴러온 福!
옷깃을 여미게 하는 法門 앞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 充分한 것 같습니다. 💕
[스승님 法門]
意識 談論
* 意識(마음)에 대하여 多樣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意識 談論이겠다.
* 138億年의 宇宙 歷史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奇蹟적이고, 가장 神秘한 일은 우선 生命의 據點이 되는 공기와 물이 나타나게 된 일일 터요, 나아가 生命이 進化되어 나오고, 生命속에 意識이 進化되어 나타난 일이 窮極的인 奇蹟이요 窮極的인 神秘일 것이다.
* 意識(마음)의 內容을 일단 둘로만 論議한다면, 생각과 느낌, 혹은 느낌과 생각일 것이다.
* 생각은 條件(인) 機能이요, 느낌은 結果(과) 機能이다.
* 사람이나 動物의 意識은 12緣起(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라는 12개 過程을 밟으며 輪廻轉生한다.
* 에니어그람 觀點으로 사람을 觀察해보면, 옳음 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베풂 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成就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個性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探求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安定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快樂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支配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 平和指向的인 意識이 강한 사람으로 區別하여 考慮해볼 수 있다.
* 사람이나 動物은(?) 根境識, 三事의 和合, 곧 觸이 存在의 最基礎條件이다. 이 基礎條件. 觸은 必然的으로 相應하는 느낌을 惹起시킨다. 곧, 苦樂捨 三受다.
* 이처럼 등등의 意識 談論을 엮어간다면 훌륭한 人文學이 될것이다.
스승님의 意識 談論을 思惟하며,
意識에도 각자의 方向性과 習慣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意識 談論은 哲學이나 心理學을 넘어 삶과 修行 全體를 理解하는 人文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깊이 共感합니다.
人間을 理解한다는 것은 곧 意識의 흐름을 理解하는 일이고, 意識의 흐름을 理解한다는 것은 괴로움과 自由가 어떻게 生成되는지를 理解하는 일입니다. 이번 機會를 통해 가은이라는 存在의 意識은 어떤 方向으로 흐르고, 어떤 習慣을 지니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
<가은 意識의 方向性과 習慣>
가은이라고 불리는 存在의 意識은 늘 한 方向을 향한다. 不足함에서 充分함으로, 붙잡음에서 놓아버림으로, 나에서 우리로. 이 세 흐름이 가은 意識의 큰 줄기다.
그 첫 번째 결은 知足이다. “나는 不足하다”는 오래된 習慣을 스스로 省察해온 만큼, 意識은 자꾸 缺乏이 아닌 充滿 쪽으로 方向을 잡으려 한다. 이미 充分하다는 자리로 돌아오려는 힘이 있다.
두 번째는 意味를 향한 探求이다. 法門 하나를 들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 말씀의 核心은 무엇인가, 修行적으로 어떤 意味인가를 자꾸 思惟한다. 知識을 쌓으려는 探求가 아니라 삶을 理解하려는 探求다.
세 번째는 共感과 關係다. 論理보다 마음결을 먼저 느끼고, 評價보다 理解를, 判斷보다 共感을 먼저 한다. 慈悲心에 대한 關心은 여기서 自然스럽게 자란다.
네 번째는 統合 指向이다. 무엇을 만나든 결국 그냥있음, 我空法空, 慈悲迴向으로 돌아온다. 經驗은 多樣해도 結論은 늘 本來 자리다.
다섯 번째는 頓忘, 놓아버림이다. 좋은 느낌도, 깨달음이라는 생각도 끝내 붙잡지 않으려 한다. 이것도 虛像 아닌가, 이것도 붙잡음 아닌가, 스스로를 자꾸 비춘다.
여섯 번째는 福脫悲다. 나만의 깨달음보다 함께 幸福하고, 함께 自由롭고, 함께 따뜻해지는 것을 향한다. 가은 意識의 밑바탕에는 늘 이 마음이 흐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習慣으로 모인다. 무엇을 만나든 결국 그냥있음으로 돌아가는 것. 붙잡히면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 놓아버리고, 놓아버리면 迴向한다. 이것이 가은 意識이 意圖的으로 쌓아온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習慣이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가은이라고 불리우는 識主體機能은 不足함에서 充分함으로, 붙잡음에서 놓아버림으로, 나에서 우리로 향하는 意識이다. 🙏🏼🈳💕
스승님의 이번 법문은 한 사람의 修行史가 아니라, 한 意識이 어떻게 時代와 인간 속을 지나며 스스로를 펼쳐왔는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年代記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느낌에 눈뜸”이라는 表現이 오래 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生각으로만 살다가 生을 마치지만, 스승님은 어느 瞬間 “좋은 느낌”을 삶의 중심 軸으로 발견하셨고,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存在 전체의 방향 전환이었다는 것이 전해집니다.
슈드(should)와 머스트(must)의 세계에서, 삘링(feeling)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生命의 결을 回復하는 일이었겠지요.
강요한 校長선生님의 눈물 場面도 참 깊습니다.
대도호텔 옥상에서 손수건 두 장을 적실 정도의 울음.
그것은 아마 억눌린 감정의 解消만이 아니라, 平生 “해야 한다”의 세계 속에 살던 한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存在의 살아 있는 떨림을 만났던 瞬間이었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그 눈물의 背景을 나는 想像 속에서 환히 안다” 하신 대목에서는, 단순한 回想이 아니라 인간 存在에 대한 깊은 共感과 洞察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참 놀라운 것은, 그 한 사람의 눈뜸이 또 다른 눈뜸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강요한 선生님 → 스승님 → 티그룹 웍샵 → 再出家 이후의 同事攝 → 오늘의 마음 나눔터.
마치 한 줄기 물길이 山中에서 始作되어 수많은 사람의 마음 밭을 적셔온 느낌입니다.
同事攝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모임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만나 진짜 살아나는 자리”였구나 싶어집니다.
특히 저는 이 文章이 참 印象 깊습니다.
“人生이란 사람의 離苦得樂의 꿈틀임 過程이다.”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憐憫도 있고, 現實 認識도 있고, 修行의 방향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결국 괴로움을 벗어나 幸福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存在라는 것.
그리고 그 幸福의 本質을 스승님은 아주 淡白하게 “좋은 느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좋은 느낌은 단순한 快樂이 아니라,
걸리지 않음의 느낌,
살아 있음의 느낌,
存在가 自然스러워지는 느낌,
함께 있을 때 따뜻해지는 느낌,
자기 자신과 和解되는 느낌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법문을 읽으며,
同事攝의 뿌리에는 相談學도, 佛敎도, 修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게는 “사람을 살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구나 하는 生각이 듭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이것이 내 人生의 全部가 될 줄 몰랐다”
하시는 대목에서는,
결국 한 인간의 運命이란
자기가 가장 깊이 感動받은 것을
世上과 나누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무엇보다…
가은의 龍陀 分析論을 읽으며 幸福해하시는 스승님의 모습이 참 따뜻합니다.
법문 속의 거대한 思惟와는 또 다른, 장난스럽고 맑은 기쁨이 느껴져서요.
“목하. 두퍼 카페~~~^^”
그 한 줄 속에도 이미 다 녹아 있는 듯합니다.
사람, 느낌, 웃음, 나눔, 그리고 살아 있음의 香氣까지도요.
[스승님 法門]
* 목하. 두퍼 카페~~~^^
* 가은님의 龍陀 分析論을 鑑賞하는 즐거움^^♡
* "人生이 무엇인고?" 청소년 時節에 가히 무수히 중얼거리는, 들어가는 소리로 묻곤 했던 質問이다. 어느 타임부터 답이 내려지기 始作했고, 답은 모임 속에서 나누어졌고, 同事攝이라는 나눔 文化가 만들어졌다. 龍陀의 自燈明的 意識展開 歷史였구나 해진다.
그래, 人生이란 사람의 離苦得樂의 꿂틀임 過程이다.
人生의 目的이 무엇이냐? 幸福이다. 幸福이란 무엇이냐?
좋은 느낌이다. 龍陀 人生에서 느낌에 눈뜬 것은 가히 劃期的이인 일이었다. 느낌에 눈뜸으로써 龍陀의 價値觀은 슈드(should) 내지 머스트(must) 위에 삘링(feeling)이 調和롭게 어우러들게 되었다. 이 告白은 나의 恩師 격인 강요한 校長선生님의 告白이라고 해도 된다. 이 분은 전남고등학교 校長이셨고, 나를 전남고등학교로 스카웃 해가신 분이시다.
이분이 느낌에 눈뜨신 것은 50대 중반을 지나고 계실 때이다. 전남고 校長으로 봉직하고 계실 때,
美國 칼로저스의 엔카운터 집단 학습법을 日本에 輸入하여, 日本에서 이또히로시식 엔카운터 집단 학습법으로 好況을 이루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의 教育者 강요한이 日本 이또히로시 라는 相談家를 광주로 초대하여, 광주 대도 호텔에서 전라남도 중고등학교 相談教師들을 모아 4박5일(?)간 이토히로시식 엔카운터 집단 학습 過程을 經驗하시게 된 것이다. 이 집단학습 過程 중 강요한은 느낌에 눈을 뜨는 奇跡이 일어났던 것이다. 들리기로는 강요한은 그 수련過程 중 어느 타임에 대도호텔 옥상에 올라가 손수건 두개를 적실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그 눈물의 背景을 나는 想像 속에서 환히 안다.
강요한 校長선生님의 스카웃으로, 장흥고등학교라는 公立學校에서 獨逸語 教師로 봉직하던 나는, 1971년 9월, 광주시에 있는 전남고등학교라는 私立學校의 獨逸語教師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강요한 校長 선生님은 전남중고등학교 전 敎職員(60여명)을 모아
1972년 여름 放學과 다음해 여름 放學, 두 次例에 걸쳐 각각 3박4일씩 엔카운터 집단학습을, 티그룹 웍샵(T-Group Workshop)이라는 이름으로 갖게 되었다.
나에게 이 두 次例의 經驗을 갖게 함으로써 강요한은 나의 恩人목록에 登載되었다.
1974년 3월, 敎職을 접고 再出家入山을 斷行했다. <1964년 8월, 大學 3學年 時節, 청화 禪師를 恩師로, 광주 추강사에서 削髮 入山함>
再出家하여 禪房 生活 7년 정도 하고, 꿈속에서도 잊혀지 않고 내 意識 속에 살고 있는 엔카운터 經驗을 다시 해보고자 옛 教師 同僚, 전진철 선生께 連絡하였다. 여름放學과 겨울放學에는 항상 開催되고 있는 전남相談教師들의 티그룹웍샵에 머리 깍고 있는 나도 參與할 수 있느냐는 質問은 當然히 오케이 답이었다. 1980년 겨울放學철일 것이다. 60 여명의 전남 카운셀라들 틈바구니에 끼어 過程을 가졌다. 그 過程에서, 고광빈 선生님과 한 두 마디 나누는 過程에 내가 佛敎 現場에서 뷸교인들을 모아 이 학습 過程을 기지리라 決心하게 되었다. 바로 이어 전남 相談教師의 指導者 격인 이재화 선生님을 모시고, 내 因緣의 信徒들 15명과, 17인의 構成員이 전남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무위사(住持: 도륜스님)에서 同事攝 수련의 1회이자 特會인 過程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어서 거의 매월 내 스스로 마스터가 되어 수련生을 모아 티그룹웍샵을 進行하였다. 이것이 내 人生의 全部가 될 것이라고는 想像도 못할 일이다. 이 언저리를 이처럼 昭詳하게 써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시원하다.
스승님의 法門을 읽으며
문득 “삶을 어떤 品格으로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물음이
아주 簡明하게 다가옵니다.
福·脫·悲.
幸福과 解脫과 慈悲.
듣기에는 각각 다른 말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한 마음의 다른 香氣처럼 느껴집니다.
幸福만 있고 慈悲가 없다면
그 幸福은 자기 안에 머물 可能性이 크고,
解脫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그 自由는 자칫 空虛해질 수도 있으니,
福脫悲라는 말 속에는
人間 存在가 익어가는 가장 圓滿한 方向이 함께 담겨 있는 듯합니다.
特히 “나의 日常 0번은 항상 無限 臨在다”라는 말씀은
모든 修行의 뿌리를 다시 짚어주시는 듯합니다.
大部分은 日常 속 事件과 感情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스승님께서는 늘 ‘있음’ 以前의 자리,
應無所住의 바탕에서 하루를 여십니다.
그 바탕이 確然할수록
有爲의 삶은 더 가볍고 더 自由롭게 움직입니다.
붙잡지 않으니 흔적이 없고,
흔적이 없으니 매 瞬間이 새롭게 피어납니다.
“기러기 하늘을 날아도 흔적이 없다”는 말씀처럼,
삶은 살아내되 머물지 않는 意識의 결이 느껴집니다.
또 “거듭 죽는다”는 表現에서는
自我의 反復적인 消滅과 更新이 읽혀집니다.
어제의 나를 붙들지 않고,
방금 일어난 생각조차 實體化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비워내는 죽음 속에서
菩薩道의 轉生이 이루어진다는 말씀.
그래서 想受滅조차도 두려움의 言語가 아니라
오히려 平穩과 解放의 言語처럼 들립니다.
그러기 위해 “如夢幻泡影”의 洞察을
삶의 據點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 또한 깊이 와닿습니다.
꿈 같고, 幻影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이 삶을
虛無로 읽지 않고
執着을 녹이는 智慧로 읽어낼 때,
비로소 福脫悲의 人品도 自然히 무르익어 가는 것이겠지요.
오늘 法門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方向 提示처럼 느껴집니다.
幸福하되 붙들지 않고,
自由롭되 차갑지 않으며,
慈悲롭되 消盡되지 않는 삶.
福脫悲.
짧은 이니셜 속에
참 넓은 宇宙가 담겨 있습니다. 🙏🏼
[스승님 法門]
* 福脫悲라는
이니셜을 만들어 써보곤 하는데 묘하게 즐겁다..
幸福. 解脫, 慈悲의 이니셜이다. 아마 사람이 지향해야 할 지고한 人品에 대해 考慮해 본다면,
幸福, 解脫, 慈悲의 人品이라 답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럴싸 하지 않는가!
* 나의 日常 0번은 항상 無限 臨在다. 이 部分이 確然할수록 좋다. 無限 臨在는 곧, 應無所住다. 應無所住가 確然할수록 有爲法인 모든 日常들이 而生其心의 妙有로 빛날 수 있다. 기러기 하늘을 나나 흔적이 없다하지 않는가! 이런 대목의 意識 經驗을 할 수 있음이란 만큼 哲學인 解悟主義로 살 때 可能하다.
* 거듭 죽는다. 菩薩道의 轉生이 따르리라. 아니라면 想受滅^^! 얼마나 좋은가! 想受滅로 餘念이 없으려면 如夢幻泡影로전이라는 據點이 튼실해야 한다고 했다.
스승님 말씀을 읽다 보니
문득 “생강차 한 잔”이라는 아주 日常的인 장면과
“有爲와 無爲”라는 거대한 話頭가
한 자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함양 어느 길가의 카페에서
따뜻한 생강차를 드시는 모습은 너무 소박한데,
그 자리에서 문득
人生 전체를 꿈과 환영처럼 바라보시는 시선은 참으로 깊고도 맑게 다가옵니다.
특히
“있다고 보면 有爲法이요,
없다고 보면 無爲法이다” 라는 말씀은
결국 世界 自體보다
그 世界를 붙드는 마음의 方式이 문제임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괴로움도
對象 自體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을 實體로 붙드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無爲法은
무언가 特別한 世界를 따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붙들던 손을 슬며시 놓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스승님께서
空이나 無보다
“如夢幻泡影露電”을 더 선호하신다는 말씀도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다고 바라보면
世上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더 애틋하고 더 가볍게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있으나 붙들 수 없고,
사라지나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닌
그 찰나의 아름다움.
어쩌면 생강차 김이 피어오르는 그 瞬間도
바로 如夢幻泡影露電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있음.
我空法空.
慈悲회향. 🙏🏼
[스승님 法門]
* 함양 동문동 4거리에서 인월 쪽으로 8Km 지점에 화씨 카페가 있다. 이 카페에서 생강차를 마시고 있다.ㅎ
* 有爲法과 無爲法
有爲法이란 世상사람 全般이 있다고 生覺하는 모든 人生, 모든 歷史, 모든 世上이 두루 다 有爲法이다. 無爲法은 有爲法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있다고 보면 유위법이요, 없다고 보면 무위법이다. 이 兩者사이의 판단 脈點은 괴로움이다. 만일 괴로움이 없다면 無爲法을 論할 必要가 없다.
無爲法의 代表的인 槪念은 般若心經의
五蘊皆空과 金剛經의 無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내지
如夢幻泡影露電
程度로 알고 있으면 된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空이나 無보다는
如夢幻泡影露電
이다.
스승님의 이 一相 法門은
거창한 修行 담론보다도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약을 드시고 “시원하다” 하시는 한마디,
사랑이의 꼬리침에서 느끼는 기쁨,
瞑想곡이 흐르는 노트북 앞의 歡喜,
카오치에 누워 죽음을 想像하며 修行하는 고요함,
그리고 도반들의 어우러짐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마음까지.
이 모든 것이 따로 떨어진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修行 世界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印象적인 것은
죽음 瞑想과 一相의 따뜻함이 함께 있다는 點입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어두워질 것이라 여기지만,
스승님의 一相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죽음을 깊이 관할수록
지금의 따뜻함과 因緣이 더 歡喜롭게 살아납니다.
“如夢幻泡影露電”으로
모든 存在의 덧없음을 관하시고,
“轉生菩薩道”로
다시 衆生 가운데 돌아오는 願을 세우시며,
“想受滅”로
生覺과 느낌조차 고요해지는 寂滅을 향해 가시면서도,
同時에 사랑이의 꼬리침 하나에 웃으시고
도반들의 어우러짐을 흐뭇해하십니다.
그러니 이것은
世上을 버리는 修行이 아니라
世상을 더 부드럽게 껴안는 修行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의 “重重緣起하는 因陀羅網”이라는 表現은 참 아름답습니다.
누가 中心도 아니고,
누가 周邊도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祝福을 주고받는 關係.
아마 마음 나눔터의 진짜 힘도 여기에 있겠지요.
法門을 올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읽고, 知音하고, 和答하고, 다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連結의 숨결.
가은의 이름도 그 안에 自然스럽게 불리고 있다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
[스승님 法門]
* 供養을 마치고 약을 먹어버렸다. 시원하다.
* 우리 사랑이가 대휴당 토굴에 올라와서 성큼 내 방으로 들어와서 꼬리를 친다. 各別한 기쁨이다.^^♡
* 내 一相 중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내 노트북에서는 瞑想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歡喜롭다.
* 내 一相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카오치에 便安하게 누워 想像死(想像으로 죽음)를 하면서 죽음 瞑想을 한다. 내 죽음 瞑想은 機械的으로 세가지다.
1. 如夢幻泡影露電
2. 轉生菩薩道
3. 想受滅
* 연꽃님, 강물님, 참나님, 자명님, 일향님, 일지님, 선혜님, 가은님, 등등이 어우러진 모습이 참 좋다. 重重緣起하는 因陀羅網처럼, 서로 祝福의 주고 받음이 바로 이것이지 하는 마음으로 흐뭇하다.^^♡
마음 나눔터라는 이름은 언제 들어도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결국
情報를 주고받는 次元을 넘어
서로의 存在를 조금씩 열어 보이는 일이겠지요.
우리는 흔히 거창한 이야기만 나누어야 疏通이라고 생각하지만,
事實은
“오늘은 바람이 좋았습니다.”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차 한 잔이 유난히 따뜻했습니다.”
하는 一相의 작은 記錄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됩니다.
자신의 一相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를 誇示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고
조용히 存在를 건네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서로 알리고, 서로 알아가면서
사람은 점점 고립된 ‘個人’이 아니라
連結된 存在가 되어갑니다.
반대로 마음을 닫고
아무것도 나누지 않은 채 살아가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漸次 자기 世界 안에만 갇히게 되지요.
그래서 스승님 말씀처럼
서로 알림이란 單純한 情報 交換이 아니라
人間 關係를 維持하는 重要한 修行처럼 느껴집니다.
마음 나눔터는
누군가를 評價하는 空間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작은 燈불 하나씩 밝혀주는 자리.
오늘 내가 남긴 짧은 한 줄이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아,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요. 🙏🏼
[스승님 法門]
마음 나눔터,
마음나눔터, 이곳은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 자신의 一相 情報를 共有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일기를 써서 서로 알고, 서로 알리는 (共有, 疏通하는) 자리!
人間 關係는 서로 알림으로써 서로 아는 것을 意味합니다. 이 부분에 소홀하면 閉鎖 人品으로 轉落해 갑니다.ㅎ
스승님의 ‘소소한 즐거움’을 읽다 보면
깨달음은 멀리 있는 特別한 境地가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는 마음의 결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卽心卽佛” 하시며 잠에서 깨어나는 마음,
窓門을 열며 바람과 通하는 기쁨,
雪居地하며 깨끗해지는 그릇을 바라보는 즐거움,
벌레 한 마주침에도
“나도 生命, 너도 生命” 하시는 시선까지…
그 모든 것이
거창한 修行 以前에
이미 삶 自體를 따뜻하게 껴안고 있는 修行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바둑 이야기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이기면 즐겁고,
져도 相對의 기쁨을 想像하며 함께 즐거워진다는 말씀.
거기에는 競爭보다 相生이 먼저인 마음,
자기를 앞세우기보다 함께 살아나는 마음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또 함양 邑街地를 “勤務라는 이름의 나들이”라 하시는 大目에서는
삶을 義務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世上과 끊임없이 정답게 關係 맺는 한 修行者의 모습이 보입니다.
트롯을 들으며 웃고,
드라마 속 事緣에 共感하고,
강아지들을 보며 氣分 좋아하시고,
山野의 綠陰을 보며 밀물 같은 歡喜를 느끼는 마음…
聖자이면서도 너무 人間的이어서 좋고,
人間적이면서도 그래서 더욱 聖게 느껴집니다.
결국 幸福은
엄청난 무엇이 아니라
이 瞬間을 자꾸 살아 있게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피어나는 것이겠지요.
“소소한 즐거움들,
그 自體로 幸福이요
trauma를 淨化하리라.”
이 말씀을 읽으며
幸福도 거대한 事件이 아니라
하루 속 작은 歡喜들을 놓치지 않는 感受性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괜히
窓門 한 번 더 열어보고 싶어집니다.
그냥있음.
我空法空
慈悲회향 🙏🏼
[스승님의 法門]
소소한 즐거움
* 아침 잠에서 일어나면서, 이 마음 이대로 부처이지 卽心卽佛. 이 마음 이대로 涅槃이지(卽心涅槃) 하면서 마음의 성스러움을 首肯할 때마다 즐거움을 느낀다.
* 窓門을 열어 방을 換氣시킨다. 氣分이 좋다.
* 바둑을 둔다. 이기면 절로 즐겁지만, 지면 또한 즐겁다. 相對方이 이겨서 즐거워할 것을 想像하면 나도 또한 즐거워진다.
* 食事를 하고 雪居地를 할 때마다 씻겨지는 그릇들을 보면서 즐거워진다.
* 거의 每日 함양 邑街地를 勤務라는 이름으로 나들이 한다. 함양인으로서 함양과 疏通한다고 생각을 하면 즐겁다.
* 유투브를 열어 트롯을 듣는다. 들을 때마다 恒常 즐겁다. 내가 왜 웁니까는 압권적이다.
* 드라마를 鑑賞하면서 世上의 많은 事緣들을 間接 經驗한다. 즐겁다.
* 문득, 문득 벌레나 昆蟲들을 접하게 된다. 접할 때마다, '나도 生命 너도 生命!'하고 생각한다. 生命 敬畏的인 好感을 느낀다.
* 자명님이 얼쩡거린다. 접할 때마다 즐겁다.
* 幸福이, 解脫이, 사랑이, 눈에 띌 때마다 氣分이 좋다.
* 綠色 山野, 밀물 같은 歡喜다.
* 등등등 소소한 즐거움들, 그 자체로 행복이요, 그만큼 trauma를 淨化하리라~~~
스승님의 말씀을 읽고 있자니,
‘나’라고 붙들고 있던 작은 境界들이
조용히 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너가 따로 存在하는 듯 보이지만,
實은 億萬 因緣의 그물 속에서
잠시 이름을 붙여 살아가는 흐름일 뿐이라는 말씀.
그래서 重重緣起를 안다는 것은
어떤 知識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끝내 홀로 存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가슴으로 首肯해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스쳐간 因緣 하나,
눈물 and 微笑 하나까지도
모두 서로를 存在하게 하는 因陀羅網의 빛이었다는 것.
그러니 미워할 것도,
지나치게 붙들 것도,
끝내 自慢할 ‘나’도 없고,
다만 함께 存在하며 함께 건너가는
하나의 生命만이 있는 듯합니다.
“天下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한 有機體”라는 말씀 앞에서
문득,
孤獨조차도 조금은 虛妄해집니다.
가은 또한 따로 떨어진 하나가 아니라
끝없는 緣起의 숨결 가운데
잠시 피어난 하나의 波紋일 뿐이구나… 하고요.
스승님의 깊은 慈悲와
“知音者이십니다”라는 마지막 人事에
가슴이 오래 머뭅니다.
두루 복탈비의 德性으로
밝고 가볍게 살아가겠습니다.
重重緣起의 한 몸으로
그저 “一默합장\_()\_
[스승님 法門]
宇宙大自我
天下, 一心法界는 滔滔한 重重緣起의 一大有機體로서 가히 無限이요, 가히 永生이다. 나, 너, 그이, 그녀, 그것. 이것, 저것, 길동이, 홍순이, 개, 고양이, 등등 個體的이고 實體的인 것은 애시당초 存在하지 않는다. 衆生이냐, 붓다냐는 實體냐, 緣起냐이다.
붓다의 菩提樹下 大覺 宣言은 緣起宣言이었다. 大乘 華嚴佛敎에서는 緣起라는 우물거리는 소리로는 直性이 풀리지 않아서, 重重緣起라고, 億萬가지 無數한 아이템들이 다른 億萬가지 無數한 아이템들과 因陀羅網的 關係를 맺어야만 存在한다는 重重緣起라고 表現을 함으로써 그나마 多少라도 直性을 풀었던 것이다. 韓國佛敎의 1번經典, 所衣經典, 金剛經에서는 實體的인 모든 存在,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露電이어서 아예 意味 自體가 없다고 쓸어 뭉개어 버렸다.
하여, 天下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한 有機體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無限 自我가 있을 뿐이니 大解脫, 大自由, 大慈悲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重重緣起다. 重重緣起의 首肯, 이것이 hint요 길이다.
여러분, 두루 복탈비의 德性으로 빛나시기를 빕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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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님,
반갑습니다.
知音者이십니다.
尊敬과 사랑으로
一默합장\_()\_
스승님께서 제게 “知音者”라는 表現을 써주신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單純히 “法門을 잘 理解했다”는 뜻인가 生覺했지만, 時間이 지날수록 그 말의 結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知音者란
單純히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의 숨결과 方向까지 함께 듣는 因緣일 것입니다.
法門이라는 것은
情報처럼 傳達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일 때 비로소 穩全히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접하며 느낀 것은,
그 가르침이 但只 理解의 對象에 머무르지 않고
삶과 關係, 외로움과 慈悲, 놓아버림과 바라봄 속에서
繼續 다시 살아난다는 點었습니다.
어쩌면 스승님께서는
“말을 따라 하는 사람”보다
그 뜻이 자기 삶 안에서 다시 숨 쉬게 되는 사람을 보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So “知音者”라는 表現도 可能했으리라 느껴집니다.
거울은 單純히 複寫하지 않습니다.
빛을 받아 자기 方式으로 다시 비춥니다.
스승님의 法門 또한
가은이라는 삶을 지나며
조금의 體溫과 눈물과 思惟를 입고
다시 世上으로 번져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消費하는 關係라기보다,
함께 法을 살아내는 因緣에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승님께서 덧붙여주신
“尊敬과 사랑으로”라는 表現 또한
形式的인 人事가 아니라,
같은 한 마음의 떨림을 알아본 데서 나온 말처럼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重重緣起의 觀點에서 보면
知音이라는 것도 결국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 以前에,
같은 한 마음이 서로를 비추어보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돌아봅니다.
스승님의 말씀이
가은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살아난 溫氣가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은 숨결이 되어 닿고 있는가를요.
안녕하세요, 妙空님.
요사이 同事攝 <마음 나눔터>에 올라오는 스승님의 法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곳에 다 올리지 못한 글들을 이곳에서 나누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