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서울국제명상엑스포」 용타 큰스님 강연록
불교와 해오주의 — 부처님의 대각과 사유의 길
📖 편집 안내 (Editorial Note)
본 강연록은 제7회 서울국제명상엑스포 명상콘퍼런스에서 진행된 龍陀 큰스님의 초청강연(09:08 ~ 1:03:06) 녹취록을 바탕으로, 현장의 생생한 육성과 온기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구술상의 불명료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윤문(潤文)한 정본입니다.
또한 강연 당일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축약되거나 생략된 큰스님의 사전 준비원고의 심원한 철학적 배경은 【講義案 補足】 카드로 해당 위치에 정갈하게 보충하여 강연의 전체 체계를 온전히 감상하실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 큰스님의 강의안 원문(들어가는 말) 전문: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제할 말씀이 있습니다. [尊重]입니다. 젊은 날 스승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말씀 하나는 門門可入입니다. 목적 공간에 들어가는 문은 많고, 어느 문으로든 선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비로봉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은 많다는 뜻이지요. 인류의 역사에는 무수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각 문화는 사람이 따라주는 정도만큼 번영했을 것입니다. 지구촌에 종교 수가 5천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종교가 제대로 진리를 지니고 있을까요?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해 주는 정도만큼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자기 종교가 옳다고 서로 싸우고 있다면 어떨까요?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답지가 보입니까? 간단합니다. 尊重입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는데, 저 사람은 저것을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尊重은 평화를 끌어옵니다. 행성(行星)끼리도 존중, 국가(國家) 간에도 존중, 문화(文化) 간에도 존중, 종교(宗敎) 간에도 존중이 요청됩니다. 한 종교 속에서도 자기가 옳다는 쌈박질이 많은 세상입니다. 불교 속에서도 제법 쌈박질이 있었던 것 같지요? 있었다면 있는 정도만큼 안타깝지요. 답지가 보입니까? 尊重이 답입니다.
불교 속에도 離苦得樂을 위해 다양한 방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주제 아래에서도 화두, 묵조, 염불, 위빠사나, 삼매주의, 증오주의, 해오주의 등 다양한 방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강의자는 해오주의(사유주의)를 힘주어 담론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주어도 尊重이라는 지평 위에서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話頭, 黙照, 念佛, 위빠사나, 三昧主義, 證悟主義 등을 두루 존중합니다.
【도입 및 인사】 120세 무탈 기원과 동사섭(同事攝)
아미타불. 여러분들 두루 반갑고 感謝합니다. 이 자리에 因緣 되신 功德으로, 지금 이 時代는 120세 時代에 왔답니다. 요새 100세 넘으신 분들이 문득문득 보이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120세를 내다봐야 돼요. 그래서 제가 기도해 드리기를 "120세까지 무탈하십시오." 내가 感謝한 분에게는 항상 드리는 인사가 "120세까지 무탈하세요."입니다.
제 紹介를 좀 하자면, 나는 龍陀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스승은 이 時代에 붓다라는 찬탄을 들으셨던 淸華 大禪師께서 내 스승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 同事攝 修練에 오셔서 修練을 받아보신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거의 다 드시네요. 내가 1980년도에 修練을 시작해 가지고 지금 46년이 됐습니다. 한 10여 년 전에 修練에 다녀간 修練生 延人員을 統計를 냈는데 3만 명이 다녀갔답니다. 그럼 또 10년이 지났으니 3만 몇천 명이 되겠네요.
그래서 나는 이 마이크 들고 이 얘기 하려고 世上에 태어난 것 같은 그런 감이 듭니다. 오늘도 이 마이크 잡기를 간절히 원했어요. 내가 나이가 좀 들었거든요. 지금 86세인데, 누가 이 지팡이를 선물하더라고요. 그래서 "나 지팡이 필요 없다" 하니까, "필요 없으시더라도 이것을 짚어야 老人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老人처럼 보이기 위해서 이것을 드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젊어 보이면 좋지 않나 싶지만, 늙은이는 늙은이다워 보여야 좋습니다. 그래서 나 이거 들고 다닙니다. (웃음)
左右之間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 因緣 되신 것이 하나의 거점이 되셔서, 여러분들의 人生에 어떤 큰 도움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1장 불교와 해오주의의 정의
오늘 이 講義 주제는 「佛敎와 解悟主義」입니다. 瞑想 컨퍼런스라고 하지요. 자, 瞑想은요, 명(瞑)과 상(想)입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瞑想하게 되면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狀態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瞑想은 傍點이 명(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想)에 있습니다.
저 瞑想을 우리의 동양식, 禪宗식으로 표현하자면 禪이라고 그럽니다. 禪의 인도 본 발음은 禪那(Dhyāna)입니다. 禪那는 思惟修입니다. 즉 '思惟하는 닦음'이 禪의 本質입니다. 그래서 瞑想의 傍點은 명에 있다기보다는 상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고요한 마음이 명(瞑)이라면, 그 고요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 이것이 瞑想입니다. 물론 傍點을 명에다 찍고 싶은 분은 찍어도 됩니다. 그러나 나는 傍點을 단연 상(想)에다 찍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임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釋迦牟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명은 方便이요 주 路線은 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解悟主義라고 하는 이 講義가 바로 상에 傍點을 둔 瞑想 文化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解悟主義의 定義가 무엇이냐? 바로 '이해의 깨달음'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知性과 理性이 思惟하게 됩니다. 思惟하게 되면 思惟를 통해서 이치를 이해합니다. 思惟를 해서 幸福의 이치를 이해하면 幸福해져 버리고, 思惟해서 깨달음의 이치를 이해해 버리면 解脫을 하는 것, 이것이 解悟主義의 路線입니다.
【이고득락과 락(樂)의 단계】 니까야의 오욕락에서 상수멸(想受滅)까지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면 離苦得樂이 삶의 궁극적인 目的이 되지요. 人生의 過程에서 苦痛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다는 目的은 누구나 부정이 안 됩니다. 감기 걸려 버리면 머리가 욱신욱신 괴롭지요. 그러면 그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감기약을 먹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으로 가는 것이 人生의 目的이에요.
그리고 釋迦牟尼 부처님께서는 人生의 目的인 락(樂)을 體系적으로 정리하셨습니다. 『니까야(Nikāya)』를 읽어 보면 락 중에 가장 제1단계 락을 五慾樂이라고 해요. 世上 사람들의 99%는 거의 절대적으로 五慾樂을 지향하는 생을 살아갑니다. 五慾樂 次元에서 幸福하다고 하면 그것도 크게 나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욕의 락에만 머무르고 있을 것 같으면 부처님께서는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보다 높은 次元의 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初禪의 락, 二禪, 三禪, 四禪의 락, 그리고 空處定, 識處定, 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락이 있고, 거기에서 한 수 더 마지막으로 가 버리면 想受滅(滅盡定)이라는 궁극의 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높은 次元의 락을 제쳐 두고 五慾樂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안타깝지 않습니까? 마지막 락이 무엇이냐? 바로 想受滅의 락입니다.
想受滅이란 무슨 말이냐? 우리 마음속을 보면 크게 둘밖에 없습니다. 생각(想)과 느낌(受)입니다. 생각과 느낌이 우리 마음의 內容입니다. 생각을 잘하면 느낌이 좋아져요. 생각을 잘못하면 느낌이 나빠집니다. 느낌이 나빠지는 것을 不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幸福하려면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想受滅은 무엇이냐? 상(想)은 생각이고 수(受)는 느낌이니, 上首는 마음 內容의 전부 아닙니까? 그 上首가 멸(滅)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려야 궁극의 경지요, 解脫이요, 니르바나(열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단계를 사다리 타듯 다 거쳐야 되는 것이냐?' 겁낼 것이 하나도 없어요. 五慾樂의 세계에서 살다가 바로 제10단계인 想受滅로 단박에 뛰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想受滅로 바로 뛰라고 가르친 분이 누구냐? 바로 달마대사(達磨大師)입니다. 고전 佛敎에서는 차근차근 닦아 올라가라고 가르쳤지만, 달마대사가 나타나서 "그렇게 복잡할 필요 없다. 卽心卽佛이다! 네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 네 마음이 본래 부처이니 부처인 것을 여기서 '아하!' 하고 認識만 해 버리면 된다"라는 禪佛敎 혁명을 宣言하신 것입니다.
제2장 체험적 자각과 공(空)의 안목
想受滅은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없음(空)'을 깨달으면 돼요. 이 깨달음은 그냥 認識입니다. "음, 그렇구나!" 하고 認識을 해 버리면 됩니다. 준비된 자는 5분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 마음을 주목해 보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수없는 생각 덩어리(念體)들을 보지 말고, 마음속의 모든 經驗을 싹 쓸어버리고 '마음 自體'를 지금 주목해 보세요. 하얀 白紙에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 이전의 본래 原緞, 마음의 原緞을 주목해 보십시오. 마음 原緞을 보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지요? '無心한 그냥 그대로의 意識 狀態'가 經驗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經驗되었다면 여러분은 달마의 직통 제자가 된 것입니다. 마음 自體를 보면 無心이 經驗되고, 惺惺寂寂한 고요 그 自體, 宇宙的인 平和가 와 버립니다. 이것이 解悟主義가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또 하나의 접근法은 마음 밖의 대상(法, 色)을 보는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山河大地, 世上의 모든 현상이 너무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운이 좋은 사람은 觀察해 보고 그것이 空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般若心經』에서 "色卽是空"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世上에 보이는 모든 色이 곧 空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空하여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知性으로 認識하게 되면, 잡을 것이 없어져 執着할 대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탁 열린 自由감을 經驗하게 됩니다.
【해공 27조와 삼시불가득】 과거·현재·미래를 사유하여 공을 깨침
色이 空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깊은 三昧에만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 역시 한때 三昧에 빠져 살았기에 잘 압니다. 그러나 『般若心經』의 골자는 관자재보살이 五蘊이 다 空하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비추어 보고(照見五蘊皆空) 일체의 苦痛에서 벗어났다(度一切苦厄)는 것입니다. 즉, 知性적인 思惟와 이해(照見)를 통해 空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世上이 空하다는 이치를 27가지로 정리하여 『解空 27條』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不可得空」입니다. 즉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의 三時不可得입니다. 과거의 것은 지나가 버렸으니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미래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현재의 것은 여기에 있습니까? 현재를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보십시오. 현재는 찰나지간에 無常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보았다 하는 순간 이미 사라져서 현재도 실체로 存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殘像을 보며 실재한다고 錯覺할 뿐입니다. 이처럼 삼시불가득으로 世上을 觀察하더라도 世上은 본래 空한 것입니다.
知性과 理性이 思惟하여 幸福의 이치를 認識하면 그 자리에서 幸福이 完了되고, 解脫의 이치를 이해해 버리면 그 자리에서 解脫을 經驗합니다. 다만 經驗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習慣性 때문에 다시 墜落할 수 있으므로, 깨달았으면 그 깨달음의 자리에 거듭 머물러 관행(觀行)해야 합니다. 머무르고 또 머무르다 보면 그 깨달음이 내 意識 전반을 支配하게 되고, 永遠한 幸福과 解脫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3장 강연의 세 가지 핵심 주제
이제 이 講義의 핵심 세 가지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菩提樹하(菩提樹下)에서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둘째, 그 緣起法의 깨달음은 무엇을 통해서 왔는가? 셋째, 깨달으신 다음 佛法을 世上에 어떤 方法으로 전하셨는가? 이것입니다.
내가 젊은 날 전라북도 金山寺에서 경영하는 화엄佛敎대학에서 10년 동안 釋尊의 일대기를 講義했습니다. 釋尊의 生涯를 108개 스토리(108 主眼點)로 나누어 講義했는데, 그중 제1의 主眼點이 바로 35세에 菩提樹하에서 깨달으신 大覺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어떻게 깨달으셨는가?" 하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 몇 년을 고민했었습니다.
※ 큰스님의 강의안 원문(제2장 대각 이전) 전문:
부처님 생애 공부를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싯다르타 태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닌 生老病死라는 비극적 한계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버리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런 인생을 기분 좋게, 행복하다고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싯다르타 태자에게는 인생 전부가 죽음이라는 사건 하나로 인해 완전히 무의미로 돌아가 버린다고 하는 그 허무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절대 한계에 대한 저항감이었습니다. 이 絶對限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할 때, 일단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답이었습니다. 그러니 카필라국의 왕자로서 아버님 정반왕의 대를 이어서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싯다르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물론 왕의 길이냐, 명상의 길이냐를 놓고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가졌을 것임은 당연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결국 명상의 길을 밟기 위해 出家를 단행했습니다. 출가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산으로 갔습니다. 싯다르타는 혼자 조용한 그늘에 앉아서 혼자 명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얻어낸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결국 명상 스승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우선 여기까지를 살펴볼 때 싯다르타 태자의 마음속에 꾸준히 흐르고 있는 핵심 되는 作爲가 思惟라는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유, 사유, 사유(思惟)입니다. 사유, 思索은 곧 생각입니다. ‘나는 죽게 되어 있단 말이야.’라고 생각을 하고, ‘나는 죽기 싫어.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한계가 진정 싫단 말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인가 길을 찾아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꾸준히 싯다르타의 마음속에서 그 知性은 꾸준하게 생각(사유)을 한 것입니다.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스승이 있다고 하니 그 스승들을 찾아가자!’하고 생각(사유)을 했습니다.
먼저 알라라 칼라마라는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 스승 밑에 가서 스승이 가르쳐 준 대로 명상을 합니다. 그 스승은 無所有處定이라는 경지에까지 올라가 있는 명상 스승이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얼마 되지 않아 無所有處定에 이르러 버립니다. 이에 감동한 스승은, “이제 자네는 내 경지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내가 죽으면 자네가 이 교단을 이어받아서 운영하시게.”라고 인가하였습니다. 싯다르타 수행자는 일말의 기쁨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싯다르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인간 모두의 절대한계인 生老病死를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마음만 고요하게 無所有處定까지 이르렀을 뿐이지 生老病死의 해탈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알라라 칼라마 스승을 떠나, 웃다카 라마풋타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非想非非想處定의 경지에 이르신 분이셨습니다. 無所有處定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가 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경지입니다. 싯다르타 수행자는 이미 無所有處定까지 올라간 상태였으니 길지 않은 시간에 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렀습니다. 웃다카 라마풋타 스승도, “놀랍고 놀랍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가 이르러 있는 경지에 이르다니, 이제 내가 죽은 다음에는 자네가 이 교단을 운영하게!”라고 인정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싯다르타 수행자는 역시 당신의 명상 목적인 生老病死의 해탈과는 무관한지라, 실망하고 웃다카 라마풋타 스승을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修定主義 문화와 작별을 고합니다.
당시 인도에서의 지배적인 수행 문화는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였습니다. 싯다르타 사문은 자연스럽게 苦行主義 명상촌을 노크했습니다. 불교문화에 六年苦行이라는 굳어진 개념은 바로 이때 형성됩니다. 싯다르타 사문은 치열한 극단의 6년 고행을 수행합니다. 一麻一米, 하루에 삼씨 한 알, 쌀 한 알만을 먹고 버티어내는 고행입니다. 6년간의 고행을 하고 나니, 몸은 皮骨이 相接하고, 기력은 하염없이 떨어져 버리고, 정신 또한 혼미해져 버렸습니다. 싯다르타 사문은 또 생각했습니다. ‘고행도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몸에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것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몸에 기력을 찾아야 한다. 우선 목욕부터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尼連禪河(네란자라강)로 가셨습니다. 목욕하시다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싯다르타 사문을 발견한 사람은 양치기 소녀, 수자타였습니다. 수자타로부터 유미죽을 공양받으면서 싯다르타 사문은 점점 기력을 회복합니다. 修定主義도, 苦行主義도 싯다르타 사문의 소망인 생로병사 해탈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주제 1 & 2】 연기법의 내용과 마스다니 후미오(増谷文雄)의 단서
부처님께서 菩提樹하에서 깨달으신 內容은 바로 緣起法입니다. 『雜阿含經』에서는 緣起를 이렇게 公式화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緣起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存在하지 않는 無我입니다. 내가 없는데 나의 생로병사와 죽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無我를 깨달아 버리니 생로병사의 苦痛이 사라지고 解脫이 열려 버립니다. 또한 緣起는 '同體緣起'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서로 얼키설키 有機的으로 연결되어 한 덩어리 同體를 이루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본래 한 몸임을 깨달으니 조건 없는 同體대비(同體大悲)의 慈悲심이 저절로 솟아납니다.
그렇다면 수정(三昧)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데, 부처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통해 이 緣起法을 깨달으셨을까요? 그 해답을 준 책이 바로 일본의 佛敎학자 増谷文雄 先生의 『붓다, 그 生涯와 思想』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나는 決定적인 端緖를 얻었습니다. 그 端緖가 바로 思惟(생각)였습니다! 八正道의 1번과 2번이 바로 正見과 正思惟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大覺은 人間의 知性과 理性이 온 우주의 緣起 이치를 깊이 思惟하여 이해해 낸 위대한 解悟였던 것입니다.
제4장 사유(해오)주의의 역사적 사례들
思惟主義, 解悟主義의 歷史적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大覺 自體가 思惟를 통한 緣起의 이해였습니다. 둘째, 大覺을 이루신 직후 다섯 比丘를 교화하기 위해 최초로 編輯하신 敎材가 바로 四聖諦, 十二緣起, 八正道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깊이 思惟하여 이 위대한 敎理 體系를 논리정연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셋째와 넷째, 鹿野苑으로 가셔서 다섯 比丘와 耶舍 및 그의 친구 54명에게 四聖諦·十二緣起·八正道를 설法하셨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理路整然한 설명을 듣고 思惟하여 그 이치를 이해(解悟)함으로써 불과 2개월 사이에 60명 전원이 아라한과를 成就하였습니다. 參禪 방석에 앉혀 三昧를 시킨 것이 아니라, 思惟를 통해 단박에 깨달음을 얻게 한 것입니다.
다섯째, 60명의 아라한이 나오자 부처님께서는 傳法을 宣言하셨습니다(布敎宣言). "처음도 중간도 끝도 理路整然하게 전하라!" 이 또한 철저한 解悟主義입니다. 여섯째, 우루벨라의 迦葉(Kāśyapa) 3형제와 1,000명의 제자들에게도 四聖諦·十二緣起·八正道를 理路整然하게 傳達하여 1,000명 전원이 한순간에 부처님께 歸依하였습니다.
일곱째, 刪闍耶의 제자였던 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의 歸依입니다. 托鉢하던 馬勝比丘(앗사지)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때 馬勝比丘가 읊은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제法종연생 역종因緣멸 아사대성주 위아여시설(諸法從緣生 亦從因緣滅 我師大聖主 爲我如是說 — 모든 法은 因緣 따라 생겨나고 因緣 따라 사라지나니, 우리 스승 대성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 명석한 舍利弗은 이 짧은 緣起 게송을 듣고 깊이 思惟하여 그 자리에서 緣起의 이치를 깨쳐 버렸고, 목건련과 刪闍耶의 문하 250명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歸依하여 佛敎 교단의 기틀인 1,250 제대 아라한을 이루었습니다.
※ 큰스님의 강의안 원문(제4장 <8> 무수한 법리) 전문:
- 반야심경의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 色卽是空 空卽是色,
- 금강경의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각종 四句偈,
- 육조단경의 不思善不思惡,
- 法性偈의 一微塵中含十方,
- 원효의 骸骨通,
- 쌍윳따니까야 3권의 無常苦無我의 解脫論,
- 無非佛, 無非菩提 등을 解悟主義(思惟主義)가 아닌 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맺음말: 해오주의(解悟主義)는 불교의 적자(嫡子)
이리하여 佛敎는 解悟主義가 佛敎의 嫡子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린 이야기 중에서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의 귀한 힌트가 들어가서, 여러분들의 삶이 조금 더 찬란해지고 自由로워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대단히 感謝합니다.
※ 큰스님의 강의안 원문(끝내는 말) 전문:
- 八正道의 1, 2번을 주목하십시오. 思惟를 잘하여 바른 이치(正見)를 발견하고, 正見을 기준 삼아 思惟가 전개됩니다. 8정도의 1, 2인 정견, 정사유는 석존의 깨달음 내력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 戒定慧 三學을 주목하십시오. 혜(慧)란 지혜롭게 생각(사유, 사색)하는 것입니다.
- 생각(사유, 사색)이 길입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불행해지지만, 생각을 잘하면 행복해지고, 생각을 더 잘하면 해탈합니다.
- 사람의 삶은 思言行이 전부입니다. 속으로는 생각하고 밖으로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데, 속으로 하는 생각이 얼마나 중요할 것 같습니까?
- 瞑想이란 명(瞑, 고요)한 마음으로 상(想, 생각)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불교인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명(瞑), 즉 三昧가 깨달음을 위한 주된 방편이라고 드세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명(瞑)의 힘, 곧 三昧力이 심(甚)하게 취약하다면 깨달음뿐만 아니라 일상사 생활이나 무수한 학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전반은, 주리반특가와 같은 특수 경우가 아니라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일상생활이나, 초중고대(初中高大) 학업이나, 4성제, 12연기, 8정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분한 삼매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강의자는 내 스스로도 삼매수행을 하염없이 즐기지만, 해오주의를 주창하는 이 자리에서는 깨달음의 조건으로 삼매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知性 혹은 理性으로 色卽是空을 이해하고, 고요한 自性을 주목하면서 歡喜雀躍하는 수많은 수련생을 봐왔습니다. ["비로봉을 발견하는 것이 수행의 99%의 의미다."] 라고 이르다가, 비로봉을 발견하고 환희작약하는 수련생에게는 ["이제 수행의 1%가 해결되었다. 99%의 수행으로 비로봉에 이르자!"]고 이르는 것이 同事攝 마음공부 문화의 한 가풍이 되었습니다.
3학, 8정도, 6바라밀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빌면서...
감사합니다.
2026. 9. 18. 천령산하 용타 합장